[정전70년 특별기획] ⑤ 생후 100일만에 부친 잃은 김순도씨의 ‘진실규명’
[정전70년 특별기획] ⑤ 생후 100일만에 부친 잃은 김순도씨의 ‘진실규명’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3.06.1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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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김순도씨가 16일 경주포커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김순도씨가 16일 경주포커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2년7월5일 경주국민보도연맹및 예비검속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표지
2022년7월5일 경주국민보도연맹및 예비검속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표지

6.25 한국전쟁 발발초기 전국적으로 휩쓴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때 아버지(김유식. 당시 30세)를 잃은 김순도씨(경주시 강동면 유금리.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경주시유족회 이사.73세)는 평생동안 ‘아버지’를 불러보지 못했다. 태어나고 100여일만에 아버지가 저 세상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김순도씨의 생일은 음력으로 1950년3월7일(양력 4월23일)이다.  6살, 3살 위의 누나 2명을 두고 전쟁나던 그해 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 8월9일 새벽 무렵 경주경찰서 강동지서 순경2명에 의해 강동지서로 연행된 뒤 4살 아래 아내(황보선분)와 2명의 딸, 피붙이 아들이 있는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했다.
김씨는 아버지가 연행된 8월9일 제사를 모신다.

“그 누구도 아버지에 대해 아무 말을 안해 주었기 때문에 엄마만 있는 줄 알았어요. 어릴때는 원래 아버지는 없는갑다 여겼습니다. 1961년 한국전쟁후 민간인희생자 경주시합동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던 날,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아니면 6학년때 쯤 어머니랑 계림국민학교에 갔던 기억은 어렴풋이 납니다. 어머니는 어릴때는 아무말씀도 안해주셨지만, 그 후로는 조금씩 그날 일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특히 아버지 6촌형님께서 전쟁때 끌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상세히 해줘서 알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김씨는 2020년12월, 2기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한뒤 아버지의 죽음을 신고했고, 2022년7월5일 억울한 죽음으로 진실규명을 받았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22년7월5일 김순도씨등 경주시에서 신청한 29명에 대해 ‘경북 경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1961년 경주시 유족회 활동에 대해 2022년7월5일 진실화해위원회 ‘경주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진실규명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들어서자 유족회를 결성하며 진실규명을 요구하였다. 당시 경북 지역에서도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구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하는 등 진상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고, 각종 신문에서도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 을 알리는 보도가 이어졌다.

경주지역의 유족들은 한국전쟁 전, 민간인에 대한 학살로 악명 높았던 이협우(민보단장)를 고 소함과 동시에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1960년 9월 5일 경주시 노동리 241번지에서 김하종을 위원장으로 1960년 경주유족회를 결성하였다. 경주유족회 회 원은 860여 명에 달했다.

1960년 경주유족회는 경주 각지에서 신고받아, 자체 조사를 하는 등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1960년 11월 13일(일) 오전 10시 30분에 경주 계림국민학교에서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 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위령제에서 학생 신분으로 추도사를 낭독했던 신청인 조희덕은 “당시 유족들 집계로는 4천 명 정도, 경찰 집계로는 2천5백 명 정도의 유족들이 모여 정부 지원으로 위령제를 하였다. 당시 국회의원, 경찰서장, 법원장, 지검장, 경주시장 등 각 기관의 대표들은 다 참여했다. (중략) 당시 경찰서장이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잘못했다는 내용을 이야기한 사실도 있다” 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1960년 11월 2일 ‘경주시 군경유족회’에 의한 ‘구(舊) 보도연맹계 세력 규탄대회’가 열리 는 등 가해자 측의 반대 활동이 있었고 1961년 5·16 이후 1960년 경주유족회 핵심 간부를 포함한 전국의 피학살자 유족회 대표들이 ‘혁명재판(군법회의)’에 회부되면서 유족회 활동은 중지되었다.

결국, 4·19 이후 형성된 진상규명에 대한 유족들의 열망과 노력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되었으며, 유족들은 또다시 고통을 감내하며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진실규명보고서 P77~79)

김순도씨의 어머니(황보선분)는 1961년 당시 경주지구양민피학살자합동위령제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김씨는 그 어머니를 따라 합동위령제에 참석했던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순도씨에게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던 부친의 6촌 형님(김성학)는 당시 경주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한뒤 김하종 경주시유족회장등과 함께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김순도씨 부친(김유식)의 죽음에 대해 2022년7월5일 ‘경주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진실규명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진실규명대상자 김유식(당시 30세, 농업)은 강동면 유금리(내동)에서 거주하던 중 1950년 8월 9일 경주경찰서 강동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 희생되었다.

신청인 김순도에 따르면, 1950년 8월 9일 새벽 무렵,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총으로 땅을 치며 ‘김유식이 나와라’라고 하였다. 김유식이 밖으로 나가자 경찰은 김유식을 강동지서로 연행하였다. 당일 김유식의 처 황보선분이 지서로 찾아가 김유식에게 점심밥을 전달했으나, 다음 날 지서로 찾아갔을 때 경찰로부터 김유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가족들은 김유식이 내남면 방면으로 끌려갔 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유식의 어머니가 현장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현장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이 현장에 가지 말라고 말려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가족들은 김유식이 경찰에 연행된 8월 9일에 제사 를 지내고 있다.

이 사건 당시 강동면 유금리에 거주하였던 참고인 조희덕(당시 9세, 이웃)은 김유식이 보도연 맹 관련으로 경찰에 연행된 후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조희덕은 김유식에 대해 “당시 30세 정도였고 신체가 좋고 매우 점잖은 사람이었다. 지나가다 마주칠 때면 ‘너희 집안 어르신들 별일 없느냐’,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김유식은 우리 아버지 조인환과 비슷한 시기 에 보도연맹 관련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강동지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천북면 신당리 산 00-0번지(일부 사유지도 있어 상세 지번은 생략/편집자) 에서 총살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진술하였다.

<일부 중략>

진실화해위원회는 김유식의 희생 사실과 경위 등을 확인하기 위해 『제4대국회보고서』, 「경주지구 피학살자합동위령제발기취지서 (1960.10.1.)」을 검토하였다.

(1) 『제4대국회보고서』에는 김유식이 “1950년 8월 9일, 천북면 동산리에서 피살(신고인 황보선분, 진실규명대상자의 처)”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2) 「경주지구피학살자합동위령제발기취지서 (1960.10.1.)」에 포함된 경주지구양민피학살자합동 위령제준비위원회 명단에는 김유식의 아내 황보선분이 기재되어 있다.

위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김유식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강동지서 경찰에 연행 및 구금되어 천북 면 신당리에서 총살되었다는 참고인 조희덕의 진술이 확보되었고, (2) 제사일이 8월 9일로 이 사건 의 발생 시기에 해당하는 점, (3) 『제4대국회보고서』에 1950년 8월 9일 천북면에서 피살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는 점 (4) 김유식의 아내 황보선분이 1960년 「경주지구양민피학살자합동위령제준비위 원회 명단」에 등재되어 신청인 김순도의 진술과 일치하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김유식은 1950년 8월경 경북 경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으로 경주경찰서(강동 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김순도씨의 부친 김유식의 죽음은 지난해 7월5일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통해 이렇게 ‘진실규명’됐다.
그러나 생후 100일 전후에 아버지를 잃은 김씨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제법 큰 규모의 농사로 중고등학교를 졸업 할 수 있었지만,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당시 ‘빨갱이 자식’의 삶은 다른 민간인 희생자 유족이 그랬듯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삶에 대해 2022년7월5일 진실화해위 ‘경주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진실규명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들에 대한 한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안고 살아왔다. 유족들은 부모와 형제, 친척을 잃은 박탈감 속에서 정신적인 후유증을 겪으며, 평범한 가정생활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유족들이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이었다. 남편을 잃은 여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 졌으나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고, 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자녀들의 교육 등 성장 과정에도 영향을 끼쳐 빈곤이 대물림 되었다. 또한, 연좌제와 관련한 신원조회제도는 유족들이 취업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장애 요인이 되었다.

신청인들은 연좌제로 인한 피해가 취업 제한, 업무 제한, 출국 제한 등의 형태로 희생자의 직계가 족뿐만 아니라 그 일가친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으며, 그로 인한 좌절감과 소외감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중략>

희생자들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죽음’ 그 자체로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살아남은 가족에 대한 감시와 통제 등 국가의 2차 가해로 이어졌다. 그 결과 유족들은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회 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과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야만 했다.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에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 피해 유족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2022년 7월5일 진실규명서 유족들의 피해 내용 발췌. <78P>

김순도씨 역시 국가의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다음은 김순도씨의 말.
“아버지의 죽음은 국가가 무고한 국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당연히 국가는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민족상잔의 6.25전쟁에서 잘한 것은 잘한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알리고 역사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여당 야당 따질 일이 아닙니다. 여당 야당은 5년이나 10년이면 바뀝니다. 그런데 이런일을 마끔히 정리하지 않으면 누구 자식이라도 당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잘못한 것은 보상을 해야 합니다. 자손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아이들 버리고 개가한 사람도 많고, 우리 어무이 같이 남편없이 농사지으며 했던 고생은 말도 못합니다. 그저 ‘너그 제수’ 라고 치부하면 안됩니다. 이제 국가도 성숙했고, 경제도, 문화도 성숙했습니다. 더 이상 모른척 하고 넘어갈 일은 아닙니다. 그 당시 당한 사람의 고통도 생각해줘야 합니다.”

김순도씨가 16일 국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김순도씨가 16일 국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김순도씨는 정부의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지만, 보상은 요원하다.
진실화해위가 접수된 사건을 조사해 일부 사건에 대해서는 김순도씨 처럼 국가폭력 사실을 밝혔지만 현행법상 국가에 보상이나 배상을 신청하기 위해선 피해자가 직접 법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개별법마다 피해 구제의 내용이 제각각인 데다 판사의 재량에 따른 피해 구제의 불균형이 우려되는 상황.

특히 적대세력 및 미군 등 외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소송을 통한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고 있어 피해 구제의 형평성 논란이 제기된다. 실제 적대세력이나 외국군에게 희생된 사건의 유족이 청구한 국가배상청구소송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되지 않아 모두 패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지만 소멸시효 기간이 지나 피해구제를 받지 못하거나 국가가 배보상해줄 것을 기대하고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유족도 상당하다고 한다.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유족 가운데 1기 진실화해위(2005~2010)의 진실규명을 결정받은 일부 유족들은국가를 상대로 배.보상 소송을 진행했고, 승소할 경우 보상금을 받아왔다. 최소 8000만원에서 최대 1억3200만원이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1기 진실화해위 이후 약 930건, 최소 7477억원의 국가 배상과 747억원의 소송 부대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때문에 1기(2005년~2010년)와 2기 진실화해위(2020년12월~)는 지난 2009년과 지난해 11월 두 차례에 걸쳐 '진실 규명 결정 사건에 대한 배보상 법안 입법'을 국회와 정부에 정책권고했다.

법안 제정의 필요성에 공감한 여러 국회의원이 배보상 법안을 발의했으나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배보상 관련 법안은 8건이나된다고 한다.

이처럼 배보상 법안 제정이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보도에 따르면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지난 9일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사망 사건의 피해자들이 보상받는 것과 관련해 “심각한 부정의”라고 말하는 등 유족들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유족회는 김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순도씨가 “국가의 사과와 보상에 여야가 따로 없다”고 절규한 것은 진보와 보수정권에 따라 진실화해위 활동이 중단됐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배보상을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이 장기간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울분으로 보였다.

“경주유족회, 이 모임에서는 제가 막내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마카(모두) 병이 있고 우리 밑 세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제는 역사를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정부가 반성을 하고 확실하게 보상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순도씨와 인터뷰는 2023년6월16일 오전 10시부터 (사)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경주유족회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강동면 유금리 자택을 방문한다고 해도 한사코 본인이 ‘시내’로 나오시겠다 고집했다. 인터뷰 직전, 기자가 간곡하게 사양하는데도 기어이 믹스커피를 타 온 사람은 김순도씨였다.

경주시유족회 사무실 정면에 걸려 있는 격문.
경주시유족회 사무실 정면에 걸려 있는 격문.

경주시유족회 사무실은 시외버스 터미널 인근에 있는 낡은 상가건물 3층에 있다.
올해 90세가 된 김하종회장부터 대부분 80세가 넘은 유족회 이사들과 회원 10여명은, 자신들처럼 가족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아직 진실규명을 받지 못한 유족들의 진실규명을 위해 거의 매일 이 사무실에서 회동한다. 
올해는 경주시 민간인 집단희생지 발굴을 앞두고 있어서 여느해 보다 더욱 자주 모인다. 
그 건물에는 엘리베이트도 없다. 

회의실로 사용하는 가장 넓은 공간 정면에는 경주시유족회가 1960년 첫 결성때부터 오늘까지, 63년째 사용하는  2개의 글이 나란히 액자속에 담겨 걸려 있다.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 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별도 증언한다."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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