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차 둘렛길 기록]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형제산을 따라 ....
[21차 둘렛길 기록]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형제산을 따라 ....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5.01.21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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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강을 넘지 못하니...
▲ 붉은색 상자안이 21차 탐사구간

일시 : 2015년 1월17일
날씨 : 맑음
인원 : 12명
구간 : 위덕대 앞~제산~국당2교~형산~사라재~왕신3리 마을회관
시 경계 : 15.6km(6시간48분)
총 이동거리 : 17km(7시간15분)

 

▲ 탐사구간 상세도.<1>번지점이 출발지, <2번>지점은 형산강우안양수장이 있는 곳, <3>은 강동일반산업단지, <4> 종착지점.
 
▲ 위덕대 앞을 출발해 화살표 방향으로 경계를 향했다.
▲ 재선충 감염목을 훈증 처리해 놓은 모습. 소나무의 공동무덤이다.

2015년 1월17일, 제21차 경주둘렛길은 영하 1도의 쌀쌀한 날씨속에서 시작됐다.
황성공원에서 위덕대 앞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위덕대 정문이 보이는 곳에서 버스에서 내려 곧바로 경계길을 찾았고,  7번 국도 우회도로 오른쪽에 있는 밭을 가로 질러 제산(182m)으로 향하는 야산에서 둘레길을시작했다. 

10분여동안 비탈길을 오르자 꽤 넓은 길이 나타났다.
해발고도 100여m 높이의 임도 양옆으로 소나무 재선충병이 휩쓸고간 상처가 깊고 선명했다.
길 옆 포항방면 비탈진 경사면은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의 공동무덤이었다.

소무재선충병에 감염된 고사된 나무를 베어 약제를 뿌리고 훈증처리한 무더기들이 산비탈 이곳 저곳에 수백여개가 나타났다.
녹색 비닐 포장지를 두른 무더기 수백개는 마치 사람들의 공동묘지와 비슷했다.

서있는 소나무라고 멀쩡하지는 않았다. 이런 저런 표식이 붙어 있었다.
경주시청 산림과 의뢰로 감염목을 조사한 듯, 일련번호를 붙여 놓은 나무도 있었고, 빨간색 천을 두른 것. 흰색 페인트를 칠해 놓은 나무들이 쉼없이 목격됐다.
밑둥이 잘린 나무에는 뜻을 알수 없는 숫자들이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 제산 정상표시.

출발한지 50분쯤지나, 제산(第山) 정상이 나타났다. 출발지점으로부터  2.35㎞거리다.
정상이지만 그 흔한 표식조차 없었다.
국토지리정보원이 펴낸 1대5만 지도에는 182m 높이라고 표시돼 있지만, 누군가 흰종이로 215m로 표시해 붙여 놓았다. 등산 지피에스등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잡혔다. 

▲ 유강터널위. 형산강과 강동쪽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 위 사진을 찍은 지점이다.

 

제산에서 20여분동안 이동해 언덕에 올라서자, 눈앞으로 경주를 지나 유유히  흘러온 형산강과 강동면 유금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7번국도 유강터널 바로 위쪽 산이다.
산으로 이어지던 포항과 경주의 둘레길은 형산강에 막혔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더니..

▲ 유강터널위 의 군자감봉사를 지낸 분의 묘.

제2 국당교 쪽으로 우회를 선택하고 경주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잡목을 헤치고 조금 내려서자 해발고도 140m 지점 양지바른 곳에 단장을 잘해 놓은 무덤1기가 나타났다.
비석엔 군자감봉사 광주안공지묘 ‘軍資監奉事 廣州安公之墓라고 써 있었다.

군자감은 조선시대 군대의 군량 관한 일을 보던 관청. 봉사는 군자감의 종8품 관직이다.
무덤의 주인은 군자감 종8품을 지낸 광주 안씨성을 가진 분인 것이다.

산을 내려오자, 유강터널을 만들기전 포항과 경주를 이어주던 4차선 도로변이다.
동강서원 입구를 알려주는 푯말이 반갑다.

▲ 제2 국당교 위.
▲ 맨 오른쪽 삼각형 표시부분이 우안정수장이 있는 곳.
▲ 형산강 우안양수장

제2국당교를 건너 포장길을 한참을 걸어가자, 국당리 마을 입구, 일제 강점기때 만든 양수장이 나타났다.
1919년 4월, 형산강 좌우안의 물을 양수해 경북 연일 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형산강 우안양수장이다.
제산 아래 좌안양수장이 있었으나 근년에 철거됐다고 한다.

10여년전까지도 가동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우안양수장은 박공지붕(양면으로 물매를 짓고 옆면은 끊은 듯 마무리한 집. 건물의 옆면에서도 지붕면이 용마루까지 올라가게 되어, 측면에 삼각형의 벽이 생기는 지붕) 이며 외벽은 목재비늘판벽으로 마감됐다.

건물안에는 1928년에 설치된 양수기가 남아 있으며 이 양수기는 당시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던 독일산인 모터를 일본이 기술제휴해서 ‘유근제작소 등전광업주식회사 ,일본대판산‘소화4년4월’이란 상표가 붙여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양수장 시설을 알 수 있는 시설로서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돼 2006년 12월 등록문화재 제292호로 지정됐다.

양수장을 바로 돌아서자 형산(兄山)으로 향하는 좁은 길이 나타났다. 
경주와 포항을 거쳐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의 이름이 이 산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시 경게를 조금 비껴 나있긴 하지만, 형산을 오르는 것은 경계길에서 당연한 의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멀지않은 곳에 동생산(제산)을 마주하고 있는 산, 높이가 조금 더 높아서 형산이라고 했으리라...

1990년대 초중반 전국적인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인문서적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이 떠 오른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라는 부제가 붙은 답사기 2권에서 저자는 영월쪽을 답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 나는 여량땅 아우라지강가에 서서 낙엽송 군락들이 줄지어 정상을 향해 달리는 저마다 다른 표정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수수만년을 저렇게 마주보면서도 단 한번도 만날 수 없음은 바로 그 자신들로 인하여 이루어진 강을 넘지 못함 때문이라는 무서운 역설(逆說)의 논리를 배우게 되었다'

지척에 동생 (제산)을 두고도 평생 만나지 못하는 형의 마음은....? 
남북분단으로 수십년 생사확인도 못하는 이산가족의 슬픔이나 무심히 마주보고 있는 형제산이나 처지는 매한가지 아닌가....상념이 꼬리를 문다.

▲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왕룡사로 향하는 모습.

형산으로 오르는 길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우안양수장 바로 옆 산길을 따라 약800m를 오르자 사찰 하나가 나타났다. 왕룡사다.

왕룡사에서는 포항쪽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행정구역상 경주시에 속한 사찰이지만, 포항시내는 물론 동해바다까지 한눈에 보이는 조망이 압권이다.
포항의 사진동호인, 산악 자전거 동호인들이 꽤 많이 즐겨찾는다고 한다.

▲ 형산정상

왕룡사를 뒤로하고 동남쪽으로 400여m 이동하자 형산(兄山. 257m) 정상이 나타난다.
정상표지석은 없었다. 산불감시 망루가 일행을 반겨줬다.(탐사 다음날인 18일, 19일 형산에서는 연이틀 산불이 났다.)
출발지 위덕대 앞에서 7.75㎞ 거리였다.

▲ 산아래로 강동일반산업단지가 펼쳐진다.
▲ 포항시에서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해발 130~40m의 농선을 따라 2.2㎞를 동진하자 작은 돌탑이 있는 봉우리가 나타났다.
포항시에서 살뜰 하게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연일 생태숲 등산안내도를 그려놓은 표지판도 있고, 벤치와 평상등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산 아래 경주쪽으로는 강동일반산업단지의 공장 지붕들이 줄지어 보였다.
이 강동일반산업단지는 강동면 왕신리 산51번지 일원 96만7000㎡로, 2009년 5월부터 개발됐다. 자동차 부품업등의 기업체들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공단 푸른지붕을 산아래 두고 능선을 따라 약 1㎞를 더 이동하자 20번 국도 산업단지 교차로가 나타났다.

▲ 강동일반산업단지 교차로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경계길이 이어진다.

교차로를 지나 다시 산길을 오른다.
강동면 왕신리와 포항 남구 대송면 홍계리가 경계를 이루는 산길이다.
일행의 진행방향에서 오른쪽, 경주방면은 강동면 왕신리다.

왕기가 있다고 해서 왕신(王信)이라고도 했고, 조선 선조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여 왜군을 물리쳤으므로 믿을 만한 곳이라고 해서 왕신, 왕실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기 일제때 왕(王)자에 날일(日)자를 붙여 왕(旺)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고 한다.
왼쪽 포항방면은 홍계리다.
‘그 옛날 마을 앞으로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배를 댈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그래서 넓은 계곡이란 뜻으로 홍계라고 부른다’(포항 남구청)고 전한다.

별다른 높낮이 없는 길을 따라 4㎞를 쭈욱 이동하자 하다, ‘사라마을 1㎞’ 이정표가 서있는 고개가 나타났다. 왕신3리 동북쪽에서 포항시 남구 대송면 홍계리로 넘어가는 사라재다.
21차 둘렛길의 종착지로 삼았다.
출발한 곳에서 경계를 따라 15.6㎞를 걸었고 점심, 휴식시간을 포함 6시간48분이 소요됐다.
그 산아래 시멘트 포장길을 쭉 따라 내려오니 왕신3리 마을회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제22차 둘렛길은 2월28일 사라재~동대봉산 무장산까지 구간에서 진행한다. 

▲ 21차 둘렛길 종착지.
21차 둘렛길에서 만나는 산 마을

형산
『삼국사기』에 중사(中祀)를 지내는 곳으로 북형산성(北兄山城)이 나오는데, 바로 현재의 형산을 의미한다. 산 위에 산성의 터가 남아 있는데,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쌓았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세종실록지리지』(경주)에 형산이 기록되어 있으며, 세주에 "경주부 북쪽에 있는데,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라고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도 형산이 기록되어 있고, 세주에 "안강현 동쪽 21리에 있는데, 신라 때에는 북형산이라고 일컬으며 중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같은 문헌 봉수조에 형산봉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도 봉수대터가 남아 있다. 동쪽으로 영일현의 사화랑산(沙火郞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의 소산(所山) 봉수에 호응한다고 되어 있다.<한국의 지명유래집>

봉수대가 있었다고 해서 봉우재. 봉오재. 봉화재라고도 부른다.
동쪽으로는 영일현 사화랑산봉수, 서쪽으로는 영천 소산봉수에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던 곳이다.
모양이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연화봉이라고도 한다.<경주풍물지리지>

제산
강동면 유금리와 포항시 남구 연일읍 자명동의 경계에 있는데, 맥이 도음산에서 내려왔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형산과 마주하기 때문에 형제봉산이라고고 한다. 이 산의 동남기슭에 동강서원이 있다. <경주풍물지리지>


강동면 유금리(有琴)
유금저수지 남쪽 마을.옛날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형산강에서 한 소녀가 슬프게 우는 것을 보고 과객이 이름을 물으니 유금이라고 하여 불리워졌다고 한다.
자연경관이 수려해 인근의 선비들이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놀던 곳이라고 하여 불렀다고한다.
옛날 한 노파가 유금이라는 손자를 업고 들판에 새를 보러 가는데, 앞에 구렁이가 지나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구렁이봐라 고 하자, 유금이가 구렁이가 아니고 용이다 말하자, 홀연 그 구렁이는 용이되어 하늘로 올랐다고 한다.
이때 뇌성벽력이 일면서 비가 오는데 용이 꼬리를 치니 건저쪽으로 흐르던 강의 물길이 마을 옆으로 옮겨와 흐르고 강물이 흐르던 곳은 들이 되었다고 한다. 용이 은공을 하려고 유금이이라는 글이 새겨딘 표석을 들판 이곳저곳에 드문드문 떨어뜨려, 가난한 유금이가 이당을 지으며 살도록 표시를 했다. 그후 유금이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도 한다.


강동면 국당(菊堂)리

이곳에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마을에서 국화재배가 잘된다고 하여 국당리로 바꿔 부르게 됐다고 한다.

강동면 왕신(旺信)리
옛날 이곳에 왕기(王氣)가 있었다해서 왕신(王信)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혹은 조선 선조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여 왜군을 물리쳤으므로 믿을 만한 곳이라고 해서 왕신, 왕실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기 일제때 왕자에 날일자를 붙여 왕(旺)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고 한다.

왕신 3리 사라마을
다라골이 있는 마을이 왕신3리
사라는 약 250년전 김응규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동네와 맣이 떨어진 외로운 마을이어서 좀더 많은 집이 생겨나고 번성하라는 의미에서 사라舍羅로 붙였다고 한다.

사라라는 지명은 경주시 서면에도 있다.
서면 사라舍羅리는 약 1200년전 밀양손씨가 개척한 마을이며, 마을이 크고 번창하라는 뜻에서 사라라고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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