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집] 실패한 친일청산 경주 역대 국회의원 선거史에도 고스란히 ...경주 최초 3선 국회의원 친일부역, 민간인 학살 희대의 살인마
[3.1절 특집] 실패한 친일청산 경주 역대 국회의원 선거史에도 고스란히 ...경주 최초 3선 국회의원 친일부역, 민간인 학살 희대의 살인마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4.03.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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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총선때는 일제고등경찰 출신끼리 대결하기도

해방이후 일제 강점기 반민족친일부역자들을  깨끗하게 청산하지 못한 것은 우리현대사의 가장 뼈아픈 부분이다.
일제에 협력해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이 해방이후 처벌을 받기는 커녕 반공을 방패막이 삼아 과거 친일행위를 감추고 해방후에도 승승장구하며 기득권 세력이 됐다.

그 왜곡된 현대사는 경주지역 국회의원 선거사에서도 발견된다.
1948년부터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총선때까지 78년동안 21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주시(군)을 지역구로 당선된 국회의원 가운데 내리 3선을 한 국회의원은 2명뿐이다. 이들 2명을 포함 누적 3선이상을 한 국회의원을 합쳐도 3선이상 국회의원은 겨우 3명뿐이다.  

경주시(군) 국회의원 선거사에서 이처럼 쉽지 않은 3선을, 그것도 내리 3선을 최초로 달성한 국회의원이 일제강점기 고등형사를 지내고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수많은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이협우였다는 사실은 왜곡된 현대사, 그 질곡의 세월이 경주에서도 켜켜이 쌓여 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뿐만아니라 이협우와 마찬가지로 일제 고등경찰을 지내며 독립군 색출에 앞장서 1948년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일제의 충견'으로 표현하며 단죄할 했으나 끝내 실패했던 악질 친일인사 서영출이 해방후 첫 경주경찰서장을 거쳐 1950년 5월, 제3대 총선,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연거푸 출마할 만큼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사실도 굴절된 현대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협우
이협우

역대 경주시(군)를 지역구로 3연속 당선, 즉 내리 3선에 당선된 이는 이협우, 박권흠 2명이고 3선연임은 실패했지만 4선을 기록한 김일윤 의원을 포함에 3선이상을 역임한 국회의원은 단 3명에 불과하다.

놀라운 사실은, 경주시를 지역구로 둔 최초의 연속 3선의원이  일제 강점기 고등계형사로 근무한 전력이 있지만 전혀 처벌 받지 않고, 해방직후 재빠르게 반공인사로 돌변해 대한청년단 내남면 5단부단장, 민보단장 등을 역임하며 민간인 100명 이상을 무고하게 죽인 희대의 학살자라는 사실이다.

1950년 5월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시작해 3대를 거쳐 1960년 3월, 제4대 선거까지 내리 세번연속 당선한 이협우 이야기다.
그는 제2대(1950년5월30일)때 대한청년단 소속으로 경주군을에서 당선된 뒤 제3대(1954년5월20일)때는 무소속으로 경주군 을에서, 제4대(1958년5월)때는 자유당 소속으로 월성군 갑에서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과거는 추악하기 짝이 없다.
1921년 경주군 내남면 망성리(현재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나 대구농림학교(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말기 고등계 형사, 내남면 서기로 근무했다.
해방후 그는 어린나이에  면서기를 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리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그가 우익인사로 출세한 계기는 1946년 10월 대구에서 일어난 10.1사건 직후 일부 좌익세력들이 경주군 일대를 습격해 경찰서가 잠시 좌익세력에게 점령된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50여명이상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협조적인 우익단체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협우는 내남면에서 그 핵심에 서게 됐다. 

그는 1947년 내남면 대동청년단장을 맡았다. 대동청년단은 서북청년단체를 흡수하면서 강력한 우익단체로 거듭났고, 1948년 정부수립후에는 대한청년단으로 재편되며 모든 우익단체를 통합해 초강력 단체로 성정했다. 
내남면 청년단장을 맡았던 그는 경찰이 부족한 경찰력을 보조하기 위해 민간인들로 민보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만들자 1949년 내남면 민보단장직도 겸하게 됐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때다. 
그는 자신의 친척동생인 이한우와 함께 내남면 민보단과 대한청년단을 이끌었다. 1948년 내남면 이조리에서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라는 이류로 주민 정우택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 3월8일 망성리에서는 유칠우 유찬조가 남로당원이라며 총으로 사살했다. 그날 저녁에는 유씨 일가족 6명을 불태워 몰살시켰다. 1950년8월까지 169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는 4.19혁명이후 구성된 유족회에 공식 신고된 숮자로 연구자들은 내남면민 200명 이상이 피살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50년5월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대한청년단 후보로 출마한 그는 불과 29살의 나이에 당선됐다. 그 무렵 경주군은 이협우 왕국이라는 말까지 돌았다고 한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청년단 활동으로 앞장서서 무고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6월28일 새벽 50명 이상 추정되는 망성리1리 11가구의 일가족을 학살했다. 비슷한 시기에 망성2리의 뒷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몰살하였다. 이협우는 내남면 망성 2리 출신으로 평소 마음에 들지않았던 주변 부락과 이웃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증언에 따르면 이협우의 청년단이 날마다 몇 트럭씩의 사람들을 태워와서 남산(금오산)의 골짜기에서 학살했다도 한다 [<.대한민국 악인열전.저자 임종금>에서 발췌]

국회의원 위세에 눌려 침묵하던 내남면 주민들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이 의원을 고소했다.
이협우는 내남면 주민 85명을 살해한 혐의로 2차례에 나눠 기소돼 1961년 2월24일부터 이듬해 5월15일까지 이어진 1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분위기가 급변해 2심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고, 1962년 6월 28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돼 처벌을 면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협우를 고소했던 민간인희생자 유족회 김하종선생등은 7년형을 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이처럼 5.16 군사쿠테타 이후 반공을 국시로 한 군사정부는 민간인 희생자 유족을 간첩으로 몰아 처벌했다. 민간인희생자 경주유족회관계자들은  2010년 12월 14일에서야 재심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협우는) 1967년 3월 27일 자유당으로부터 경주시·월성군 선거구에 공천받았으나 출마하지는 않았다. 1975년 3월 10일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월성군지부가 결성되자, 상임대표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고향 경주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7년 8월 11일 성건동 장미아파트 자택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향년 66세. 그의 유해는 경주시 건천읍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상 나무위키>

경주지역 최초의 3선 국회의원이 반민족친일행위자에다 수많은 민간인학살을 주도했던 극우 인사였다는 사실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시민이 불행해 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자가 경주지역구 최초의 3선 국회의원이었다. 

서영출.
서영출.

부끄러운 역사는 여기는 그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악명 높았던 고등경찰로 친일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인물이 1945년 10월12일부터 1946년2월7일까지 해방후 초대 경주경찰서장을 지내는가 하면 그후 여러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하기도 했다. 
서영출이다. 
그는 현재도 여전히 경주경찰서 홈페이지 역대서장 소개에 사진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기록한 ‘반민특위 반민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에서는 서영출을 ‘倭帝(왜제)의 忠犬(충견) 서영출’이라는 제목으로 달고 ‘倭帝(왜제)하에 경주경찰서장으로 손수 민족의 선구자를 구금 학살한 일제의 충견이었던 자로, 전과를 뉘우침 없이 동포의 생명을 유린하였다고 한다’고 그의 죄상을 기록해 둘 정도다.

친일행적과 관련한 당시의 신문기록을 보면 그는 49년 1월31일 체포돼(자유신문 49년2월2일) 2월3일 특검으로 송치돼 이어진 4월12일 공판과정에서 ‘고문은 부하의 짓’이라고 뻔뻔한 거짓말(자유신문 49년4월13일보도)을 하기도 하고, 5월13일 공판에서도 끝끝내 사실을 부인(자유신문 49년5월14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1949년 4월 공민권 정지 3년형 구형 받았으나 복역중 형 면제를 받았다는 언론의 보도(2016년 KBS대구. 기억, 마주치다 단죄)가 있다. 다른 수많은 반민족 행위자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고, 그후에도 사업을 하며 권세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비극이 서영출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그도 반공인사로 둔갑해 이협우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를 살해하기도 했다. 
해방후 초대 경주경찰서장을 거쳐 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 직전까지 대동청년단 활동을 하며 민간인 학살에도 관여했다.
경주군 읍내리 대동청년단장이던 서영출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1948년 5월1일 경주군 교리에 거주하던 최순(당시 57세.독립운동가 최준의 막내동생)이 기부금을 내지 않는다며 납치해 살해했다.

경주 최부자집 12대손인 최순은 독립운동 자금을 송출한 인물이었는데, 해방후 5.10 국회의원선거가 다가오자 친일 경찰출신 서영출이 독립운동을 한 최순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막으려 단원들과 함께 권총으로 사살케 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최순이 당선되면 전직 고등계 형사였던 자신이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반민특위가 서영출에 대해 기록한 부분. 왜재의 충견이라고 썼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특위 반민죄 목록에서 서영출을 기록한 부분. 왜제의 충견이라고 썼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 고등경찰로 온갖 악행을 하며 권력을 누렸던 그는, 해방후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도 부렸다.  
서영출은 1954년5월20일 치런 제3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제5대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낙선했다.

공교롭게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일제고등경찰을 지내고 해방후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현역 이협우와 대결을 하기도 했다.
식민통치에 부역했던 일제 고등경찰 출신끼리 해방된 조국의 국회의원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1954년 5월20일 제3대 국회의원선거 경주군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서영출은 17.04%,8179표를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해 19.38%, 9305표를 받은 이협우에게 패배해 낙선했다. 
1958년5월20일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던 서영출은 4.19혁명직후인 1960년7월29일 실시된 제 5대 국회의원선거 경북 제9선거구에서무소속으로 다시한번 도전했으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당시 7명이 출마한 선거에서 그는 4위로 낙선했다.  그 후 공직선거 출마기록이나 활동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인물자료에 따르면 서영출은 1950년에만 경주규조토광업사 사장으로, 기타 경주자동차협회장, 경주경찰서후원회 부회장,대동청년단 경주단부 단장, 경상북도광산협회 감사, 경주철공협회 이사, 대한독촉( 大韓獨促 )경주지부 청년부장, 경주지구 대한노총 철도연맹, 경주대한노총등 고문으로 등재돼 있을 정도로 대외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1949년부터 1959년까지 광업회사 대표로 경주읍, 서부리, 감포, 양북면 등지에서 사업을 했다는 기록도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 후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영출에 대한 더 많은 기록은 기사하단 2021년8월21일자 경주포커스 기사 참조>

악질 반민족 친일부역자들은 처벌과 단죄를 받기는 커녕 좌우 이념 대결속에서 우익, 반공인사로 둔갑해 온갖 위세를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아픈 역사는  그저  과거에 머물지 않고 경주지역 현대 정치사에서도 버젓히 이어져 왔다.   
제105주년 3.1독립만세 운동 기념일에 다시한번 식민잔재 청산을 하지 못한 부끄러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되돌아 보게 된다.<끝>


다음은 나무위키의 이협우 기록. 
1921년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2]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34년 대구공립농림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 입학했고, 이후 1940년 졸업하였다.(중략)

대구공립농림학교 졸업 후 8.15 광복까지의 행적은 다소 불분명하다. 다만, 학교법인 효암학원 이사장인 채현국의 증언에 따르면, 이협우는 일제강점기 말에 고등계 형사로 근무했다고 하며, 다른 설에는 농림학교 졸업 후 출세를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194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회 기수, 내남면사무소 서기 등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에는 농림부 곡물검사소 검사원, 경주출판소 검사원, 경주군 농업의원 등으로서 활동하다가, 우익 정치인에 입문하여 대한청년단 내남면 5단 부단장, 내남면 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49년경 내남면 민보단장으로서 내남면 일대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3]

선거구 기반을 탄탄히 닦아 월성군은 이협우 왕국이라는 소리도 들었으나 정작 국회 원내활동은 별로 없음
한국전쟁 당시 무수한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한 장본인이라 각 신문에 보도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함
- 《사진으로 본 국회20년》(1968)에 수록된 이협우 전 국회의원에 대한 인물평.참조

이협우 선거기록.
이협우 선거기록.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청년단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16명의 후보가 난립한 끝에 당선되었다. 2대 국회에서 농림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협우는 역시 극우 활동을 주도해나갔으며, 보도연맹 사건에도 가담하여 역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하여 자유당 월성군당 위원장 및 자유당 조직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월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역시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9월 15일 주민 학살 사건의 피의자로 살인·방화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혁명재판에서 이협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진행하여 감형되고, 결국 1963년 9월 15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어 이협우는 석방되었다. 당시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으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범죄를 저지른 극우파들을 다수 석방하고, 역으로 이들을 고소한 피해자들을 빨갱이라고 잡아들여 고문을 가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일이 많았다.[4] 973일간 미결감에 수감되었던 이협우는 1964년 1월 1일 정부를 상대로 미결감에 있었던 기간에 대해 1일당 100원으로 계산해 총 97,300원의 형사보상을 청구했고, 1월 8일 320일분의 32,000원의 보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1967년 3월 27일 자유당으로부터 경주시·월성군 선거구에 공천받았으나 출마하지는 않았다. 1975년 3월 10일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월성군지부가 결성되자, 상임대표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고향 경주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7년 8월 11일 성건동 장미아파트 자택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향년 66세. 그의 유해는 경주시 건천읍 선영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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