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 ③ 어떤 뺑소니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 ③ 어떤 뺑소니
  • 경주포커스
  • 승인 2021.12.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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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임. 작가.경주우체국소포실장.

<연재>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 - ③어떤 뺑소니

글쓴이 : 조정임. 작가.경주우체국소포실장.
2013년4월부터 2014년5월까지 경주포커스에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연재.
시즌2는 2021년 10월부터 매월 1회 연재.

수년 전 나는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꽤 먼 거리에 있는 시골마을의 우체국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한 적이 있다. 높은 재를 넘나들어야 하는 곳이라 모두가 꺼리는 곳이었다. 좌천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이들의 시선과는 달리 출퇴근길 시야를 가득 채워주는 푸르른 자연을 만끽하는 재미가 쏠쏠하여 나는 나름 행복했다.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시골길이라 운전을 하면서 주변 풍광을 즐기며 여행하듯 드라이브를 즐겼다. 도시에서는 차창을 꼭 닫은 채 주로 라디오나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차창을 내리고 새소리, 물소리 자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때론 그들의 장단에 맞춰 콧노래도 흥얼거리곤 했다. 아주 옛날에는 나무꾼들이 다니던 오솔길이 조금씩 넓혀지면서 지금은 하루에 두세 번 마을버스도 다니는 도로가 되었다. 오롯이 나만 다니는 길인 것처럼 적요한 퇴근길이었다. 보름이 가까웠음을 암시하는 휘영청 밝은 달빛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때였다. 평탄한 길을 지나 산길의 초입에 접어들 무렵 주변 풍경을 살피며 느긋하게 핸들을 꺾는 내 차 앞으로 무언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서 부딪히고 말았다. 천둥소리보다 더 큰 소리와 함께 무언가의 힘에 밀린 듯 내 차는 휘청거렸다. 나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운전대를 꽉 부여잡고 멈칫하였다. 큰 사고가 났음을 직감하였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부들부들 떨렸다. 떨구었던 고개를 들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전방을 주시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나가던 사람을 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했던가?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의외였다. 고라니 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들판을 가로질러 달아나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었다는 안도도 잠시 차에서 내린 나는 오랫동안 고라니가 달아난 들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사고를 낸 가해자는 나인데 왜 고라니가 달아난단 말인가? 구급차라도 불러야 할 판에 나는 넋을 놓고 고라니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망연자실 오래오래 서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굉음의 결과는 피 묻은 앞 범퍼가 절반쯤 이탈한 것이 다였지만 나는 사고 후 처리를 하지않고 현장을 떠난 뺑소니 범이 되어 버렸다.

그 날 이후 나는 출퇴근길이 전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그 길을 지날 때면 절룩거리며 달아나던 고라니의 뒷모습이 떠올라 내내 죄책감이 들었다. 고라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치료를 받지 못한 고라니가 영영 불구가 되어 절룩거리며 불편한 다리로 저 산을 헤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며칠이 지난 후 거짓말처럼 다시 그 고라니를 만났다. 사고로 인한 후유증인지 자동차 소음만 듣고도 도로 근처에서 산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내가 그때 그 고라니라고 확신하게 된 것은 여전히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지난여름 산에서 고라니가 내려와 산비탈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엄마의 푸념에 대뜸 울타리를 치라니까 “놔둬라, 산에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으면 이래 마을까지 내려 오겠노”하시며 종내는 고라니조차 걱정하던 엄마의 하소연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퇴근길에 고구마 한 상자를 사서 고라니를 보았던 그 산 초입에 슬며시 놓아두고 왔다. 그리고는 지나다니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라니가 먹는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고구마가 흔적도 없이 없어진 걸 보며 고라니가 먹었을 거라 위안했다. 그리고도 수차례 고구마를 사서 그곳에 흩어 놓았다. 정말 고라니가 먹었을까 궁금하여 차에 앉아서 한두 시간을 지켜보기도 했지만 나는 그 고라니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고 그 곳에 가 살펴보면 고구마는 감쪽같이 없어지곤 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면죄 받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고구마 한 박스를 내려놓고 돌아서 오는데 부스럭거리는 기척 소리가 들렸다. 고라니 한 가족이었다.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 버릴까 조바심에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한참 더 내려와 조금 떨어진 곳까지 내려와서야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그 순간 고라니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쳐졌다. 달아나지 않았다. ‘이제 괜찮다’ 라고 말해주는 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새끼들과 산으로 사라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미 고라니가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때 그 고라니일거라 믿었다. 나는 그곳을 떠나올 때까지 가끔씩 그 자리에 고구마나 콩 같은 채소를 갖다 놓곤 했었다. 그 후 고라니를 다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나의 뼹소니는 완전범죄가 되었고 로드 킬을 당한 산짐승들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그 고라니를 떠올리며 살아간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춥고 빈한한 이 겨울을 견딜 고라니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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