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신라인의 진산 낭산 둘레길
[2017년 12월] 신라인의 진산 낭산 둘레길
  • 편집팀
  • 승인 2017.12.2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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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7년 12월] 신라인의 진산 낭산 둘레길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 12월 탐방 참가자들이 능지탑지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12월23일은 신라의 진산 낭산 둘레길을 따라 나섰다.
문무왕의 아들로 신라중대 왕권을 확립했던 신문왕릉으르 출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뒤 최초로 건립한 쌍탑가람으로 호국사찰로 유명한 사천황사지, 신라최초의 영황 선덕여왕릉,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지, 신문와으이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위해 세운탑이 있는 황복사터, 신라 3대 문장가, 이두를 집대성한 설총묘, 진평왕릉을 답사했다.

다소 쌀쌀한 날씨였지만, ‘외투를 벗어야 할 만한 적당한 높이의 낭산’과 넓은 들판을 여유롭게 걸으며 숨겨진 유적을 찾아보는 재미와 사색의 여유를 즐길수 있는 12월 답사에는 정원 40명을 훌쩍 넘겨 43명이 신청하고 참가했다.

내년 1월 첫 답사는 1월27일 소금강산 권역을 찾아 간다.
선착순 40명, 참가비는 5000원. 탐방 신청 및 문의 신라문화원 054-774-1950

12월 답사한 주요유적지.

<신문왕릉>
사적 제181호
지정(등록)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번지

▲ 신문왕릉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5소경제도를 설치하였고, 고구려·백제·말갈인을 포함시킨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을 완성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을 다졌다.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둘레돌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고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狼山)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어, 낭산 동쪽 황복사터 아래쪽 12지신상이 남아있는 무너진 왕릉을 신문왕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신문왕릉에서 경주 신문왕릉으로 2011년 7월28일 명칭이 변경됐다.<문화재청>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 사천왕사지.
▲ 사천왕사지 귀부를 살펴보고 있다.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종전 사천왕사지라는 명칭에서 2011년7월8일 경주 사천왕사지로 명칭이 변경됐다. <문화재청>

<경주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지정(등록)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번지

▲ 선덕여왕릉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문화재청>

<경주 능지탑지>
경북도 기념물 제34호
지정(등록)일 1982.08.04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621-1번지

▲ 능지탑지

경북 경주시 남산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임종 후 10일 내에 왕궁 밖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과 이웃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도 추정되고 있다.


<경주 황복사지 3층석탑>
국보 제37호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

▲ 황복사지에서 진평왕릉쪽으로 넓은 들판이 보인다.

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문화재청>

<경주 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지정(등록)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608번지

▲ 진평왕릉
▲ 진평왕릉을 답사하고 있다.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고, 경주 명활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1년 7월28일 신라진평왕릉 → 경주 진평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 진평왕릉에서 황복사지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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