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신라 흥망성쇠의 길을 따라서…
[2017년 10월] 신라 흥망성쇠의 길을 따라서…
  • 편집팀
  • 승인 2017.10.3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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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8년 10월] 신라 흥망성쇠의 길을 따라서…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 참가자들이 오릉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 신라건국 이전 서라벌을 다스린 여섯 마을 시조들의 위패를 모신 양산재에서 재배하고 있다.
10월28일 <한수원과 함께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신라 흥망성쇠의 길을 따라 나섰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오릉에서 출발,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나정(사적 제245호), 신라 최초의 궁궐터라고도 전해지는 창림사터를 거쳐 신라천년 사직의 종말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오는 포석정 일대를 두루 답사하는, 힐링로드였다.

오전 일정은 포석정에서 마무리했다.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기온이 참가자들의 몸을 움추려 들게도 했지만, 신라의 건국과 패망 이야기가 전해오는 서남산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가을답사'의 정취를 누리기에는 더할나위 없는 좋은 날이기도 했다.

오후 답사는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사적 제19호 계림,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월정교 복원현장, 신라천년 궁궐 월성을 답사했다.

이날 답사에는 울산, 포항, 부산, 경주지역 시민 40여명이 참가했다. 멀리 청주에서도 일가족 4명이 참가해 경주사랑역사문화탐방의 ‘전국화’를 실감케 했다.
2016년 3월 경주에 본사를 옮긴 한국수력원자력(주)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매월 넷째 토요일 답사전문단체인 신라문화원 주관으로 진행한다.

다음달은 11월25일 ‘신라속 조선이야기’를 주제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민속마을과 옥산서원 독락당을 거쳐 동학발상지 용담정 일대를 탐방한다.
선착순 40명, 참가비는 5000원. 탐방 신청 및 문의 신라문화원 054-774-1950
 
창림사터

▲ 창림사터 삼층석탑에서.
창림사는 남산에 있는 많은 절터 가운데 이름이 뚜렷할 뿐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 있어 유명한 유적지이다. 해목령과 남산성을 배경으로 하고 청룡 백호 두 산맥이 조용히 둘러막은 가운데 덩실하게 솟은 언덕 위에 창림사가 자리 잡고 있다. 서쪽 정면에는 높이 6m 남북 길이 45m 되는 토대가 있는데, 원래는 돌 축대였고, 오르내리는 계단도 여러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대위에는 동서 36m 너비의 평지가 있고 그 동쪽에 높이 2m되는 돌 축대가 있다. 축대 위에 가로36m 세로36m 넓이의 터가 있으니, 이곳이 법당 터라고 생각된다. 법당터 뒤에는 약 4-5m 길이로 돌들이 줄지어 흩어져 있는데 법당 둘레에 담을 쌓았던 모양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당시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돌 축대 밑에는 많은 주춧돌들이 흩어져 있는데 한 변이 69.7cm되는 방형대 위에 지름 61.9cm되는 둥근 기둥 괴임을 새긴 정교한 것들이다. 본래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짐작되는 주춧돌의 거리는 약 3m 간격으로 되어 있다.

돌 축대 앞에 길이 1.2m 되는 장대석이 있는데 법당으로 오르내리던 계단 돌로 보인다. 아래터 남쪽에는 머리 없는 쌍두귀부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건국기의 왕궁 지였던 금성의 옛 터이며 이곳에서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13세 되던 해까지 성장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창림사터 삼층석탑

법당 뒤, 담자리에서 36m 동쪽으로 가면 언덕의 정상이 된다. 이곳에 거대한 석탑이 남쪽으로 허물어져 있었다. 1979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하였는데 2층 및 3층의 옥신과 탑재 일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옛날모습 그대로 복원 하지는 못했다. 이 탑의 높이를 대략 측정해보면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와 기단부가 7m이다. 1층 옥신에는 목조건물에서와 같이 사면에 쌍바라지 문을 조각하고 중앙에 문고리를 새겨 놓았다. 문짝너비는 두 짝을 합하여 38cm이고 높이는 102cm이다.
무엇보다도 이 탑을 예술품으로 높여주는 것은 상층기단 면석에 새겨 놓은 팔부신중상들이다. 모두 구름을 타고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풍성한 양감과 박력 있는 조각 솜씨는 보는 사람을 감탄케 한다. 1층 옥신 윗면에 둥글게 패어진 사리공이 있는데 지름이 33.3cm이고 깊이가 24cm이다.

조선시대 말기의 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선생께서 "昌林寺無垢淨塔願記"를 모사해 놓은 것이 있다. 원래 동판에 새겨진 것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로 시작되어 국왕이 탑을 세워 축원 한 글을 새긴 것인데, 탑을 세운 해가 唐 代宗 9년(AD855)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연대로는 제46대 문성왕 17년이다. 이 사본이 창림사탑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탑의 조성연대를 855년으로 하여왔다.

그런데 이 추정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9세기 중엽의 신라의 조각은 쇠퇴기에 접어들 때이므로 조각이 힘이 없고 박력이 없을 때다. 창림사탑의 조각은 볼륨과 기백이 강한 탑이다. 이러한 조각 솜씨는 늦어도 8세기 후반기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지금 창림사터에 서 있는 사리 공에는 추사의 사본한 동판은 들어 갈 수가 없다.

이 탑 사리공은 둥글게 패어져 있는데 지름이 33cm 이다. 추사의 무구정탑원기의 사본의 크기는 가로 30cm 세로 24cm의 네모꼴이다.네귀의 모서리가 걸리기 때문에 둥근 사리 공에 들어갈 수 없는 크기이다.

창림사에는 8부신 중을 새긴 또 하나의 탑이 있었다. 정면 토대 앞에서 팔부신중을 새긴 상층기단 면석 세 개가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창림사 터에 서 있는 탑 상층기단 면석 크기가 높이 110cm, 너비 110cm, 우주너비 28cm인데 비해 박물관의 것은 높이 86cm, 너비 92cm, 우주너비 18cm이니, 규모가 조금 작은 탑이었다. 이 탑의 사리공은 네모로 패어져서 추사의 사본 동판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故고청 윤경렬선생은 추정하고 있다.

조각솜씨로 보아 연대를 855년경으로 보고 있다. 박물관에 진열된 팔부신중상은 긴나라상과 가루라상과 야차이다. 긴나라상은 얼굴 양면에 말머리가 달려있고, 가루라상은 입이 부리로 나타났고, 야차상은 입에 염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구름을 타고 천의자락을 곱게 나부끼며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창림사탑은 남산에서 제일 큰 탑이다. 통일초기의 큰 탑들은 하층기단 기둥이 다섯 개인데, 신라중하대의 탑으로 하층기단 기둥이 다섯 개인 것도 이 탑의 한 특징이다. 임금이 왕가의 영광을 위해 절을 세우고 탑을 세운 창림사는 제일 높은 언덕 위에 하얀 탑이 우뚝 솟아 서남산을 장엄케 했을 것이다.<신라문화원>

포석정

▲ 포석정
포석골은 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을 향해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골 부근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유느리골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장장 2.5km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높은 바위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 밑에서는 소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 는 멋진 여울을 이루고 흘러내려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 하겠다. 옛날 신라왕실에서 쉼터로 만들었던 포석정이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돌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이다. 돌 홈모양이 구불구불하여 전복껍질 모양과 같으므로 포석정이라 하였다. 이 포석정의 돌 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 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나라 돌보기에 지친 임금님께서 맑은 하늘을 지붕 삼아 포석정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워 놓고 손발처럼 아끼는 신하들과 둘러앉아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던 포석정이다. 악사들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풍류에 맞추어 궁녀들은 은빛 요패를 반짝이며 오색 한 삼이 무지개를 이룰 때, 산들바람에 꽃잎이 나비처럼 날아와 흘러가는 물 위의 술잔과 같이 춤추며 흐를 때 임금과 신하들은 지친 시름을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풍류의 자리에서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제55대 경애왕 때 일이다. 왕 4년(927) 9월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신라는 9세기에 접어들면서 왕권쟁탈 싸움과 귀족들의 사치와 쾌락으로 타락된 생활로 인해 백성들은 굶주리며 견디기 어려워 도적떼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신라의 북쪽 땅은 고려의 왕건이 차지하고 서쪽 땅은 후백제의 견훤이 차지하여 서로 통일을 노리며 싸우던 때였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 행차하였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 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견훤은 김부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 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지친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천년 신라의 종말을 이 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니 이곳은 언제나 원한의 대상으로 미움을 받아왔다.

▲ 포석정. 가을빛이 완연하다.
계림이 누렇게 단풍들어
견훤이 신라를 망쳤단 말인가?
포석정이 도적을 불러들여
그르쳐 놓은 것을 어찌하랴?
군신들인들……

楓葉鷄林己改柯
甄萱不是滅新羅
鮑亭石自召丘代
到此君臣無計何

윗글은 16세기 학자인 조식(AD 1501-1572)이 포석정을 읊은 시의 한 구절이다.
하느님이시여 귀신을 시켜
이 돌 홈을 지키게 하여
뒷사람들께 보여 주소서
노는 사람들의 끝을
거울삼아서

我願天公令鬼守
留與後人鑑此石

위의 글은 15C 학자 조위(AD 1454-1503)의 시 한 구절이다. 마시고 노는데 열중하면 그 결과는 망하는 것뿐이니 포석정을 그 본보기로 삼으라는 뜻이다. 이 글들을 보면 마치 포석정 때문에 신라가 망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포석정이 비록 귀족들의 놀이터라고는 전해오나 그 위치는 남산성 바로 밑에 있다. 남산성은 당시 나라를 지키는 군사들의 심장부였으니 왕이 남산성을 순시하시고 나라를 위해서 애쓰는 충신과 장수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포석정에서 베풀었을 것이니 포석정은 남산성의 휴게소 같은 곳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제49대 헌강왕(AD 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 앞에 나와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하니 신하들은 물었다. "그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읍니까" .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 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읍니까".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 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祥審舞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하였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중엽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호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었다.

원래는 큰 돌 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 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 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구전되어 올 뿐이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있는 배성 못이 수원지라 전한다.


포석정 주악사(鮑石亭 奏樂詞)
최광유(崔匡裕)
기원사 실제사 화려한 두 절 동서로 있는데
그 가운데 자리 잡고 포석정이 있다네.
소나무 잣나무 서로 어울려 무성한데
넝쿨은 온통 하늘을 덮었네.
머리를 돌려 보는 곳마다 진달래 꽃 피고 피어
짙붉은 웃음 골짜기에 가득 차 넘네.
으스름 실안개는 서기처럼 자욱이 빗겨 있는데

祇園實際己兮 二寺東西
松栢 相倚兮 蘿洞中
回首一望兮 塢花滿
細霧輕雲兮 竝朦朧

위의 글은 경문왕대(AD 861-875)에 당나라로 가서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신라인 최광유의 시다.
<신라문화원>

▲ 월정교 복원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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