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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능과 탑 불상의 도시 경주[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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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26  16: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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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능과 탑 불상의 도시 경주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 참가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 불국사에서.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4월 탐방은 능과 탑, 불상의 도시 경주를 주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 괘릉, 경주박물관을 둘러보는 시간이었다.
22일 탐방단은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신라인들이 꿈꿨던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 불국토의 정수를 느끼고, 석굴암 본존불의 뛰어난 조형미에 감탄했다.

통일신라 왕릉의 대표격인 괘릉에서는 석인상을 보며 신라인의 국제감각을, 경주박물관에서는 신라가 남긴 뛰어난 문화유산에 새삼 큰 감명을 받은 시간이었다.

이날 탐방에는 총 41명이 참가했다.

지난해 3월 경주로 본사를 이전한 한국수력원자력(주)이 경주시민들에게 '경주 바로 알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월1회 5천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참가할 수 있다.
탐방은 경주 최고의 답사전문 문화단체인 신라문화원이 주관한다.

5월에는 27일 <신라인이 이룬 지붕없는 박물관 –동남산> 두 번째 탐방으로, 부처골 감실불상, 탑곡 마애조상군, 보리사, 경북도산림환경연구원, 화랑교육원등을 찾아 나선다.
문의 및 참가신청. 774-1950.

다음은 이날 탐방한 문화유적 중 원성왕릉(괘릉)을 집중 알아본다.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한 설명은 문화재청 세계문화유산, 불국사 석굴암편으로 대신한다.

불국사 석굴암 알아보기.

<원성왕릉>  통일신라 대표왕릉
   
▲ 석인상 앞에서 괘릉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적 제26호 원성왕릉은 흔히 괘릉으로 부른다. 괘릉이라는 뜻은 능을 걸다라는 의미다.
왕릉이 조성되기전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곳을 메우고 능을 마련했는데, 능 내부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다음은 문화재청의 설명.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경주괘릉으로 부르던 것을 2011년 7월28일 경주원성왕릉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는 일괄해 보물제 1427호로 지정돼있다.
아래는 문화재청의 설명.

적 제26호 경주 원성왕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한 쌍씩 석조상들이 배치 되어 있으며 수량은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 10점이다.

무인상은 서역인 또는 서역풍을 나타내고 있어서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며, 통일신라시대 절정기의 사실적인 조각인 성덕대왕 능 석인상을 계승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상이다.

또한 이들 문·무인상들은 흥덕대왕 능의 석상들보다 앞선 생동감을 갖고 있고 역동적인 사실성을 나타낸 대표적인 조각품으로 신라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8세기의 이상적 사실 조각과 함께 당대의 찬란한 신라 문화의 진수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아래설명은  이날 신라문화원이 배포한 자료집에서 괘릉에 대한 내용이다.

괘릉(원성왕릉)


   
▲ 석인상 앞에서 박주연 문화유산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경주에서 울산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가 불국사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조금더 가면 국도변의 왼쪽 낮은 구릉에 괘릉이 위치하고 있다. 괘릉이란 뜻은 능을 걸다라는 의미인데 이곳에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 곳을 메우고 능을 마련했는데 능 내부인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괘릉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이고 높이는 6m 지름은 23m이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목조 건축의 석조 기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높이 95cm, 길이 120cm 크기의 판석으로 된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어져 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12지신상을 조각하였으며 조각 수법은 신라 12지신상 가운데 우수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왕릉의 둘레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깐 회랑이 왕릉을 두르고 있으며 회랑 둘레에는 높이가 1.7m되는 25개의 석주를 세우고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돌기둥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사이에 끼웠던 난간 살대는 거의 망실되고 없어서 새로이 마련 설치해 놓고 있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의 석상인 혼유석이 위치해 있고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2쌍, 冠劍石人 1쌍, 西域人 모습의 石人 1쌍, 華表石 1쌍이 마주 대하고 차례로 도열해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 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이와 같은 유형의 신라 조각품 가운데는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호인상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관계로 아라비아 계통의 상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도 있다.

통일 신라 왕릉의 대표격인 이 괘릉의 능묘 제도는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를 통해 당의 능묘 제도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12지상, 석사자 등을 배치하는 것은 성덕왕릉의 예와 같이 신라인의 창안이며 각종 석조물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 수법은 당시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능묘에 배치된 12지상은 따로 조각하여 배치하였던 성덕왕릉의 형식을 탱석에 직접 조각하는 형식으로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다.

무덤 주인은 신라 39대 원성왕 유력
   
괘릉에 있는 사자상.
이 괘릉의 주인에 대해서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鵠寺에 있으며 鵠寺는 당시에 崇福寺라 하였다. 또 숭복사에는 최치원이 쓴 四山碑銘중의 하나인 대숭복사비가 남아있다고 했다. 지금 괘릉에는 비석이 보이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괘릉이 역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1669년에 간행한 동경잡기가 최초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괘릉은 누구의 능인지 모른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근세인 구한말 어느 때인가부터 신라 제31대 문무왕릉이라고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경잡기』에 나오는 수장이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추정한 것 같다. 1906년에는 일본인 今西龍이, 1916년에는 大坂金太郞이 괘릉을 찾았는데 이미 그곳에는 문무왕릉이라는 팻말이 있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일 합방 이전부터 문무왕릉으로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의 풍수』를 쓴 村山智順과 『조선의 미술사』를 쓴 關野貞이 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저서에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今西龍은 1906년에 이미 원성왕릉일 것이라는 추론을 내린바 있다. 즉 당시 今西龍은 1939년에는 확인된 숭복사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관계로 해서 신라의 곡사, 고려의 숭복사가 괘릉 부근에 있다고 한다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추정을 한 것이다.

이러한 괘릉의 문무왕릉 설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1970년대 이후에야 원성왕릉으로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 이전 1967년도 5월 17일에 감은사지 동쪽 해중 200m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릉이라는 사실이 삼산오악 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석인상.
중국 북경 대학에서 민족 사학을 연구 하다가 귀국한 정인보 선생이 1950년 납북되기 이전에 남긴 원고 중에 掛陵考라는 단편 논문이 있다. 이 글은 위당 선생께서 납북된 이후인 1955년에 󰡔담원국학산고󰡕라는 책 속에, 또 1972년 한국학 연구 총서라는 책에 소개됨으로써 일반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위당선생은 괘릉이 문무왕릉이 아니고 원성왕릉이라는 것을 각종 문헌기록을 통해 고증하였다. 이후 1965년 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해 원성왕릉설이 강력히 뒷받침되었고 1972년에는 변영섭에 의해, 1973년에는 강우방씨에 의해 정설로 굳어졌다. 일본에서도 1966년에 大坂金太郞에 의해 원성왕릉으로 추정 되었다. 그에 의하면 『동경잡기』 이후인 조선 영조 때에 경주 국당리 출신인 권종락씨가 남긴 갈산집과 경주 율리 출신인 손윤구씨가 남긴 성재집을 일별해 보면 괘릉이라는 한시를 찿을 수 있는데 당시만 해도 문무왕릉과 괘릉은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한다.

석인상 주인공 두고도 많은 이설 제기 현재도 논란

석인상의 주인공에 대해서 살펴보면 많은 이설이 제기되어 있고 현재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경우이다. 먼저 능 입구에 들어서면 神道임을 알리는 화표석이 서 있고 다음에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석인상이 머리부분에는 중앙아시아식 터번을 착용하고, 오른팔을 위로 하여 주먹을 움켜잡고 있으며 1m가량의 몽둥이를 왼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을 하고있다. 키가 2.4m나 되는 이 거대한 석인은 深目高鼻한 서역인으로서 무사의 복장인 갑옷을 입지 않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을 입고 있다. 이 주인공에 대해서는 페르시아인·아라비아인·이란인·오만인 등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서도 무인상, 객사상, 병사상 등 각기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서역인상의 뒷모습 가운데는 직경 10cm정도의 복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이 획인되고 있다. 즉 이것은 신라 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조각상의 예술성 부여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서역인의 신라 내왕이나 정착에 바탕을 둔 두 문화가 융합된 결과라 하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서 있는 석인상은 지금까지 문인석 또는 신라인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견해는 기존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문인석은 관검 석인으로 신라인은 위구르인으로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석인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전면은 문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옷 속에 칼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옷자락 끝에는 칼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문복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것이 앞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울러 제도상의 문무을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북송부터 우리나라는 고려 때부터 문무관이 구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신라 시대는 문무의 구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라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종래의 생각을 뒤바꾼 것은 고려대 권영필 교수이다. 그는 1992년에 발표한 논고에서 이 석인상을 일러 전체 윤곽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짙은 눈썹을 강조한 나머지 조각적으로 표현하여 이마와 눈자위를 턱이지게 하였으며 오뚝한 코와 꽉다문 입 사이에 팔자형의 수염을 얹고 있다. 또 양 귀밑에서부터 턱 전체를 가지런히 빗겨진 턱수염이 상당한 볼륨으로 덮고있다. 가늘고 긴 눈은 한국적이라 다소 친근감을 주고 있지만 악센트를 주고 있는 터럭들은 이례적이라 하겠다. 터럭들이 이란계와 같은 곱슬곱슬한 것이 아니라 직선형이다. 이러한 면들은 위구르인들의 인상과 직결되는 요소들이다. 용강동 석실 고분 출토의 문관상이 이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러면 왜 신라왕의 능묘에 신라인 신하들을 조각하지 않고 외국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신라는 당의 능묘 제도를 숙지하고 있어서 능묘 앞에 문무인석과 객사를 도열시킬 제도적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대등관계에 처해 있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제도에 대한 욕구는 당연히 唐制의 縮小 또는 自肅의 形態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라고 그 원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왕릉의 완비된 모습은 왕의 계승 관계가 부자 상속 또는 형제 상속 등 가장 안정적인 정치 상황일 경우에 한하여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 한가지 부언하여 둘 것도 1926년에 일본사람들이 백주에 공공연하게 도굴하는 것을 당시 경주군청 주사 김한이 보고 제지하였다고 하며 유물의 도굴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이곳의 난간 석주 1개가 괘릉 뒷마을에 있는 수봉정 정원에 놓여 있으며 3개 부분으로 파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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