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 <2> 동남산
[2017년 2월]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 <2> 동남산
  • 취재팀
  • 승인 2017.03.0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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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2017년 2월]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 <2> 동남산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 2월 탐방 참가자들이 밝은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2월 탐방은 25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붕없는 박물관, 경주남산 두 번째 답사였다.
1월 서남산 탐방에 이어 2월엔 동남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주시 남산동 973번지 사적 제138호 서출지를 출발해 남산동 삼층석탑~칠불암 마애불상군~신선암 먀애보살반가상~백운암~천룡사지로 이어진 탐방은 1년동안 진행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 탐방’의 12개 코스 증 가장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동행한 어린이들도 큰 어려움 없이 전 구간을 소화 해 낼 만큼 여유있고, 또 즐거움이 가득한 탐방이기도 했다.

2월 탐방에도 1월과 마친가지로 정원 40명이 신청했다.

한편 지난해 경주로 본사를 이전한 한국수력원자력(주)이 경주시민들에게 '경주 바로 알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월1회 5천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참가할 수 있다.
탐방은 경주 최고의 답사전문 문화단체인 신라문화원이 주관한다.
3월에는 경주남산 세번째 탐방으로 오릉에서부터 나정~양산재~차임사터, 포석정, 동궁과 월지, 계림, 월성등 신라의 흥망성쇠를 고루 살펴 볼수 있는 유적지를  찾아 떠난다. 문의 및 참가신청. 774-1950.

아래는 2월 지붕없는 박물관 세계문화유산 동남산 탐방에서 만난 주요 문화재.

<서출지>

▲ 서출지에서 송득곤 문화재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잇는 못.
이 정자는 1664년(조선 현종5년)에 당시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웠다. 지금 박물관에 있는 신라 최대의 흥륜사 석조도 이곳에 있었던 적이 있으며, 지금도 북쪽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 석등대석이 정자 옆에 남아 있다.

이 연못에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신라의 역사가 발전기로 접어들 무렵인 신라 제21대 소지왕 10년, 즉 488년 정월 15일이었다.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 왕이 가마에서 내렸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어대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시요" 왕은 이상히 여겨 장수 한사람을 시켜 까마귀를 따라 가게 했다. 남산 동쪽 기슭의 양피 촌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구경을 하다가 그만 까마귀 간 데를 잃어 버렸다.

따르던 장수가 길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마침 늙은 노인이 못 가운데로부터 나와 글이 있는 봉투를 주었다. 그 바깥 표지에 쓰여 있기를 "열어 보면 둘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하였다.

장수가 돌아와서 글이 쓰여 있는 봉투를 왕에게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이 죽을 바에는 봉투를 떼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때 일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두 사람이라는 것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라는 것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러하다하고 봉투를 열고 종이를 펴보니 "거문고집을 활로 쏘라"(射琴匣)라고 씌여 있었다.

왕이 대궐로 들어가 거문고집을 보고 활을 쏘니 궁중 안에서 불공을 보살피는 중(內殿焚修僧)과 궁주가 몰래 만나서 간통을 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그 후로 나라에서는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때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얹어 놓는데 이러한 풍속은 까막까치를 위함이라 한다. 그리고 매달 첫째 돼지날과 쥐날과 말날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무슨 일이든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풍습이 전해져 왔다 한다.

이언에 이것을 "달도"라 일렀으니 "슬프고 걱정되어 백 가지 일을 금기함"을 이름이다. 이로 인해 못 이름을 서출지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산동 동.서 3층석탑>

▲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124호.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이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전형적인 3층석탑의 양식이다. 동탑은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基壇部)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단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층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탑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해, 이 동·서 두 탑은 각각 양식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흔치않은 모습이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마주 서있다. <문화재청>

<칠불암마애불상군>

▲ 칠불암마애석불
보물로 지정돼 있다가 2009년 9월2일 국보 제312호로 승격지정됐다..
남산에서 제일 깊은 골짜기인 봉화골에 있는 것으로, 남산의 불적중 가장 규모가 크고 솜씨가 뛰어난 불상으로 꼽힌다.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 일곱 불상이 남아있는 곳에 한 암자를 지었으므로 보통 칠불암이라 부르고 있는데, 실상 신라 때 절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힘차면서도 화려한 기와무늬, 귀인들이 기도 드리고 중병을 고쳤다는 비석조각들로 미뤄 이곳에 나라에서 경영하던 큰 사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 면에 부조된 삼존불상과 그 앞의 돌기둥에 부조된 4구의 불상 등 모두 7구의 불상이 있어 칠불암으로 불려 오고 있다. 국보 제312호.
유구(遺構)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석경(石經)을 벽면으로 세운 일종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삼존불상은 4.26m 높이의 바위 면에 꽉 차게 부조한 마애불로서, 거의 환조(丸彫)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되어 있다. 본존은 높이가 2.6m나 되는 거대한 좌상이며, 두 협시보살도 2.1m로 인체보다 훨씬 장대하다.

이 삼존불 앞의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은 높이가 2.23m 내지 2.42m 정도로 바위 모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하였다

칠불의 배경은 기기묘묘한 거암(巨巖)으로 하늘에 잇닿은 듯 드높게 솟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경사가 가파른 험한 산등성이에 절을 짓기 위해 동북양면에 돌 축대를 쌓아 터를 만들고 터 위에는 서쪽 바위면에 기대어 자연석으로 불단이 병풍처럼 솟아 있는데, 이 바위에 삼존대불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 바위면에서 동쪽으로 1.74m쯤 간격을 두고 6면 입방체의 바위가 삼존불 쪽으로 조금 기울어지려는 듯이 솟아 있다. 이 바위의 면마다 여래상을 새겨 사방 불을 나타내었으니 이곳 불상은 모두 칠불이 되는 것이다. 이 칠불은 천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 지내왔지만 삼존불의 코가 조금 상했을 뿐 대체로 완벽하게 남아 있다.

<신선암 마애보살상>

▲ 신선암 마애보살상
보물 제199호.
높이 1.4m의 마애보살반가상은 칠불암(七佛庵) 위에 곧바로 선 남쪽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지그시 감은 두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구름 위의 세계에서 중생을 살펴보고 있는 듯하다. 오른손에는 꽃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천의(天衣)는 아주 얇아 신체의 굴곡이 사실적으로 드러나 보이며 옷자락들은 대좌(臺座)를 덮고 길게 늘어져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갖춘 광배(光背) 자체를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보살상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며,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이 불상 앞의 공간은 2m정도이며, 그 앞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보살상 앞에 앉아 아래를 내다보면 아득한 아래 세상은 송림의 푸른 구름으로 덮여 있고 멀리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들은 하늘 위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로 착각을 일으키게 되니 내 몸은 부처님과 같이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이다. 남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고 있는 이 바위면은 비가와도 불상이 젖지 않도록 윗쪽 면이 조금 앞으로 나오도록 경사를 지어 깎아내고 그곳에 높이 1.53m, 너비 1.27m의 배광을 감실모양으로 파면서 돋을새김으로 보살상을 나타냈다.

정상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넓직한 큰 바위가 가로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돌 축대로 보충하여 적당한 크기의 평지를 만들어 앞뜰로 삼고, 다시 1.25m 높이의 돌 축대를 쌓아 건축 터를 마련했다.

지금도 많은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건축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칠불암 사원에 예속된 암자로 짐작이 되는데 근래에까지 이곳에 신선암(神仙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므로 이 보살상을 신선암마애불로 부르고 있다. 신라시대 당시에는 무슨 절 무슨 불상이라고 불렀는지는 알수 없다.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

▲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고위봉으로 오르다 용장리 쪽으로 내려오는 오솔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석탑.
문화청이 2월7일 보물로 지정 예고한 탑이기도 하다.
탑주변 지곡 제3사지에서 출토된 와당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을 통해서 이곳의 사찰이 통일신라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석탑지 주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조각과 백자 조각 등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사찰의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말해준다.
이 석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2000∼2001년까지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선행한 후, 석탑 부재를 모아 2002년에 복원하였는데 노반석 아래의 부재는 남아있는 원 부재를 사용하였다.

다음은 문화재청이 이 탑에 대해 보물지정을 예고하면서 설명한 자료다.
이 탑은 전탑형 석탑으로 8개의 커다란 방형석재를 기단으로 구축하고 옥개석이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별다른 장엄장식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점에 있어서 전형적인 통일신라석탑과 다른 점을 보인다. 그 세부를 살펴보면, 7매의 석재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8매의 기단석이 상·하 2단으로 나뉘어져 각각 4매씩 올라와 있다. 상층 기단석 위에는 3단의 탑신 받침이 있는데, 하단 모서리가 깨진 상태이며, 이 탑신받침 위에 1매의 석재로 된 1층 탑신석이 올려 있고 그 위에 올린 옥개석 전각의 네 모서리에는 풍탁이 달려있던 구멍이 뚫려있다. 2층 탑신석 역시 1매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3층 탑신은 2층 옥개석 낙수받침의 상단과 3층 옥개석의 하단이 맞닿아서 이어진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전탑은 안동을 중심으로 나타나지만, 이 탑과 유사한 벽돌형식 석탑은 경주지역에 집중하고 있어서 지역적 맥락을 이룬다. 즉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과 경주 남산동 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 등과 함께 경주지역, 특히, 남산 주변의 산록에서 조형된 장소적인 특징도 나타나고 있어 한국석탑에서 ‘전탑형 석탑’이라는 하나의 계보를 이룬다.

이처럼 용장계지곡 삼층석탑의 건립 시기는 경주지역에 유사한 형태로 남아있는 서악동 삼층석탑과 남산동 동 삼층석탑이 9세기경으로 편년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용장계 지곡 석탑의 건립 시기 또한, 9세기경으로 편년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 석탑의 옥개받침의 단수가 위 2기보다 작고 비례가 수직 상승감이 큰 것으로 보아 서악동과 남산동 석탑보다는 늦은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 탑은 모전탑 계열의 형식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악동 삼층석탑과 남산동 동삼층석탑을 통해 제작시기의 추정이 가능하고, 일부 파손되었으나 상륜부가 남아있고,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외관이 양호한 편이므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백운암>

백운암은 수리봉[고위봉] 정상에서 조금 동쪽에 있는 바위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선 이 폐사지에서 눈에 띄는 것은 큰 바위를 축대로 쌓아 놓은 것으로 높이가 5m나 된다.

돌 축대의 길이는 16m가 되는데 동면은 9m정도 북으로 꺾였다가 다시 동쪽으로 20m가량 계속되는데, 이곳은 지대가 높은 곳이라서 축대의 높이는 1.5m 정도이다. 이 축대 위의 건축터는 너비가 14m 가량 되는 넓이인데, 여기저기 나즈막한 축대가 여러 곳에 있고 기와조각들이 수 없이 흩어져 있어 거대한 사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도 조그마한 암자가 있으니 백운암이라 한다. 백운암이란 마을에서 볼 때 암자가 구름 위에 있다는 뜻이다. 뒷배경을 이룬 봉우리는 수리봉 정상과 높이를 같이하는 거봉으로 큰 바위산이다. 이 봉우리에서 날개를 편 듯이 산발이 양쪽으로 뻗어내려 터를 감싸고 있는데 이 산등성이는 모두 거암(巨岩)과 기암(奇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터의 축대에 해당할 만큼 큰 법당과 강당 그리고 중문, 종루 등 화려 장엄한 건물들을 이 터에 채워 놓고 이 배경을 바라볼 때 얼마나 장대한 가람터인가 비로소 짐작이 갈 것이다.

백운대(白雲臺)라 추정하고 있는 건물지는 이 폐사지로부터 동쪽으로 얼마 가지 않은 길 옆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길 북쪽의 절벽을 이룬 바위 위에 건축터가 있다. 서쪽은 3.5m, 동쪽은 1.3m 가량 높이의 축대를 보충하여 바위위에 평지를 마련하였다. 건축터의 길이는 5m, 너비는 3.5m가 된다.

이 곳에 흩어져 있는 수 없이 많은 기와조각들이 건축터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臺)란 높은 곳에 지은 집을 의미한다. 이 터에 앉아 앞을 내다보면 마석산 봉우리가 마주 보인다.

<천룡사지>

▲ 천룡사지 삼층석탑
천룡사는 고위산의 절경을 뒤로하고 약 20만 평의 분지로 이루어진 평지에 통일신라 초에 대가람을 조영하였던 곳이다. 『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 天龍寺에
“동도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가 하나 우뚝 솟아 있는데 세속에서는 고위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 高寺, 또는 天龍寺라고 한다”라고 하는 천룡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계속되는 내용 중에 “서로 전하는 말에, 옛날 단월(檀越-施主)에게 딸 둘이 있어서 이름을 天女, 龍女라 하였는데 부부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을 따서 天龍寺라 이름지었다”고 하여 천룡사 창건에 관한 연기 설화가 보이고 있다.

천룡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더불어 호국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알려진 사찰이다. 위에 기록한 『삼국유사』의 내용중에 천룡사가 廢하면 곧 신라가 망한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즉, 『討論三韓集』(우리나라의 古代記錄)에 “鷄林에는 두 줄기의 客水와 한 줄기의 逆水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근원이 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에 이른다. 俗傳에 역수는 이 주의 남쪽인 마등오촌의 남쪽을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되는데 중국에서 온 사자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三國遺事』 卷第三 紀異 第二 文虎王 法敏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자 이제는 신라까지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도 방책을 강구하기를 사천왕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명랑법사를 비롯한 12명의 明僧으로 하여금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군을 물리치게 하였다.
신라가 두 번이나 당군을 물리치자 당나라 高宗이 당시 당나라의 옥에 갇혀 있던 한림랑(翰林郞) 박문준을 불러 ‘너의 나라는 무슨 비법이 있길래, 두 번이나 많은 군사를 보내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박문준이 본국을 떠난 지 10여 년이 되어 본국의 일을 잘 모르고 다만 당나라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덕을 갚기 위해 狼山 남쪽에 천왕사를 지어 황제께서 만년토록 장수하시기를 축원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고종이 대단히 기뻐하여 예부시랑 악붕귀(禮部侍郞 樂鵬龜)를 신라에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이 두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 온 당나라 使者 樂鵬龜는 천룡사에도 올라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천룡사는 문무왕 때에는 이미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寺地에는 귀갑문(龜甲文)이 뚜렷한 석당(石幢)의 귀부, 측면에 안상(眼象)이 조식(彫飾)된 석조(石槽), 대형 맷돌, 원형주초(圓形柱礎) 1座, 삼층석탑 부재가 있는데, 이 석조물들은 모두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폐탑(廢塔)을 복원하고자 1990년 11월 7일부터 29일까지 탑지 인근 주변을 발굴하였는데, 이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팔면감실 소석불좌상, 금동여래입상 3구, 금동대좌, 녹유전편(綠釉塼片) 등이 출토됐다. 이와같이 문헌기록, 현존 유물, 발굴에 의한 출토 유물들을 종합적으로 미뤄, 천룡사는 통일신라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천룡사 기록에 의하면 천룡사는 통일신라말에 폐허가 된 것을 고려 초에 최승로의 손자 최제안(崔齊顔)이 重建하였다고 되어 있다. 최승로는 시무책 28조를 올려 불교의 폐단도 지적한 바 있으나 만년에는 그 자신도 불교에 귀의 하였던 명유이다. 그러한 그의 손자인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건한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불수 있다.

최제안은 聖壽가 무강(無彊)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기원하여 천룡사를 중건하였던 것이다. 이때 전당(殿堂), 낭각(廊閣)과 방사(房舍), 주고(廚庫)를 모두 이룩하고 또 석조불(石造佛)과 이소불상(泥塑佛像) 몇을 만들어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였다. 이와같이, 고려시대에 대대적인 창건불사(重創佛事)가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90년도 발굴에 의해 출토된 은제윤왕좌보살좌상(銀製輪王坐菩薩坐像)과 귀목문(鬼目文) 암막새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후의 사정은 잘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佛宇條에 “天龍寺 在高位山” 이란 기록이 있어 조선 성종때까지 존속하였고 또한 발굴 때 “嘉靖二十七年 戊申正月 日始 九月畢 大施主李去中 大施主訥---” 라는 명문와(銘文瓦)가 수습되어 조선 명종 3연(AD.1548) 번와(飜瓦) 또는 중창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묘법연화경』 중에 “康熙二十七年 戊辰 五月 日 慶尙道 慶州府南高位山 天龍寺開刊” 이란 간기가 있다. 강희 27년은 조선 숙종 14년(1688)에 해당되므로 천룡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지 않고 계속하여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룡사는 통일신라초에 창건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적어도 숙종 14년(1688)까지는 사맥이 이어졌으며, 현재 절터에는 조선시대 후기 평와편과 자기편(磁器片)들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미뤄 조선시대 후기까지 法燈을 밝히다가 어느 시기에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천룡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188호.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1990년에 실시된 조사과정에서 기단이 1단임이 밝혀졌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과,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의 일부와 머리장식의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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