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서라벌별곡] ④ 경주화교소학교(慶州華僑小學校)
[연재-서라벌별곡] ④ 경주화교소학교(慶州華僑小學校)
  • 경주포커스
  • 승인 2015.07.1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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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출판기획 및 집필에 종사하면서 문학과 역사의 대중화 작업에 노력해왔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숨겨진 역사의 비밀, 조선왕조실록》,《소설 대왕 세종》,《이태준의 문장 강화》,《삼국지》(전 30권) 등 다수가 있고, 《웅진 푸른담쟁이 우리문학》,《내가 만난 역사 인물 이야기》 등 다수의 출판기획 작업에도 참여해왔다. 경주에 내려온 이후 현재 ‘운수좋은날’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예술과마을’이라는 출판사를 설립, 지역사회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경주에 내려온 첫 해, 그러니까 2011년 봄과 여름은 꽃구경과 주변 명승지 탐방으로 한 세월을 보내고 가을이 왔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먹고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업종은 이미 식당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메뉴였다. 무슨 메뉴를 만들어 팔아먹고 살까?―이런 고민을 하면서 낙서를 해둔 메모지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잔치국수, 닭곰탕, 빵게칼국수, 연탄불석쇠구이, 육국수, 튀김 전문점…’ 등 웬만한 메뉴는 거의 다 적혀 있다. 이렇듯 선뜻 메뉴를 결정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다가 마침내 결정한 것이 ‘설렁탕’이었다. 정통 서울식 설렁탕 전문점!

설렁탕을 주메뉴로 정한 까닭은 이렇다. 원래 술을 제법 즐기는 편인 데다가 생업의 특성상 밤을 새워 책을 만들거나 마감에 쫓기며 잡지를 편집하는 일이 잦았던 나는 그야말로 ‘자학’ 같은 밤을 지샌 이튿날 새벽, 마침내 일을 마무리지었다는 홀가분한 기분과 더불어 거의 탈진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설렁탕집으로 가서 깍두기 국물을 듬뿍 풀어넣은 얼큰한 국물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는 경우가 많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날밤을 새운 고단함이 잔설(殘雪)이 녹듯 스르르 풀어지면서 세상도 한결 부드러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곳 경주에 내려와보니 곰탕집은 심심찮게 눈에 띄어도 설렁탕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한번은 설렁탕을 먹으려고 포항까지 갔을까! 이때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경주에 없는 메뉴로 하자! 내친김에 상호도 지었다. ‘운수좋은날’로… 이 말이 어감도 좋고 발음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것 같았으며, 게다가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좋은날>에 대표적인 서민음식 설렁탕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렇게 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는 설렁탕 만드는 법을 배우러 원근(遠近)을 마다 않고 다니는 한편으로 가게터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시내권은 물론 안강․외동에 이르기까지 경주의 거의 전 지역을 살펴보았다. 그 와중에 가계약까지 마쳤으나 막판에 누수문제로 건물주와 전 세입자가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포기한 경우도 있었고, 위치는 무척 마음에 들었으나 문화재 관련의 이유로 언제 헐릴지 몰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봉황대 옆 지금은 ‘혼자수박물관’이 들어선 그 옆자리, 과거 ‘일 바질리코’라는 스파게티 가게가 있던 자리였다. 봉황대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위치는 더할 수 없이 마음에 들었으나 건물 자체가 언제 헐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포기했는데 결국 그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마침내 헐리고 지금은 잔디밭으로 변모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가게터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지역정보지에 내놓은 식당 하나를 보기 위해 옛 경주여중(현재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근처로 갔다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라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바로 그 옆집, 다 쓰러져가는 녹슨 철대문에 삐뚤빼뚤한 청색 사인펜 글씨로 써서 나일론줄로 꽁꽁 묶어놓은 A4 용지 크기의 문구를 발견했다. 내용인즉 건물을 내놓는다는 것과 연락처였다.

어럽쇼… 하고 좌우를 살펴보니 사각 시멘트 대문기둥 각각에 한쪽은 ‘경주화교소학교’, 다른 한쪽에는 ‘경주화교협회’라고 검은 대리석에 한자로 길게 새겨져 있었다. 이걸 들어가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주저앉은 철대문을 힘겹게 열고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순간 조금 과장하면 기절하는 줄 알았다. 교사(校舍)였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지붕선이 주저앉아 있은데다 비바람을 막으려고 쳐놓았던 청색 천막천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미친년 머리카락처럼 흩날리고, 마당 한쪽으로는 온갖 쓰레기들이 켜켜히 쌓인 가운데 무․상추․파 등 각가지 야채들이 무심히 자라는데 땅은 또 왜 그리 질퍽질퍽한지…. 

▲ 폐교된뒤 방치된 모습.

난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묘한 향수가 일어났다. 아, 어린 시절 나도 저런 교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저 추녀끝에 매달아놓은 학교종이며 검은 콜타르를 칠한 판자때기도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그리고 저 뭐라고 깊이를 표현하기 힘든 분홍과 청색 계열의 낡은 페인트는 또 얼마나 아련하고 아늑한가… 살아온 생업이 생업인지라 그 순간에도 인천의 부둣가를 배경으로 한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가 생각나기도 했다. 

▲ 소설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 된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구한말 청국(淸國)의 조계지(租界地)로 자리 잡은 이래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주무대가 되기도 해서 주변에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 자유공원이 있다. 1950년대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는 양갈보, 흑인병사, 석탄차 등이 등장하는 것에서 보듯이 전후(戰後)의 신산했던 우리네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좀더 가까이, 현관 앞에 세워진 리어카를 밀치고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나는 또다시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한동안 방치된 것은 분명해 보였으나 아직도 앙증맞은 수십 개의 책걸상이 가지런히 놓인 그 옆으로 학생들의 교재를 꽂아둔 책장, 풍금, 주산, 지구의, 탬버린, 큰북과 작은북, 중국지도, 세계지도, 중화민국 국기 등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또 한쪽 벽면에는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다. 

 
▲ 폐교되기 이전의 교실풍경. 이 모습에서 학생들만 들어내면 이날 내가 목격한 풍경과 비슷하다.
뜻밖의 보물단지를 발견한 듯한 야릇한 흥분으로 다시 고개를 마당으로 돌리니 그제서야 늦가을의 시린 하늘 아래 펄럭이는 태극기가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요즘은 빈티지니 복고풍이니 해서 옛날 것을 살리는 것이 대세인데 이 건물과 이 물건들을 그대로 살려 인테리어를 하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제법 근사하겠는데… 더군다나 이곳에는 ‘스토리’가 있다. 이 스토리를 팔아도 되겠는걸’ 하고 말이다.

연락처에 적힌 대로 전화를 걸어 주인을 만났다. 듬직한 풍채에 인상이 무척 좋았다. 이분이 바로 경주화교협회 회장님으로 나보다 딱 24년 연상의 범띠생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역 근처에서 중국집을 하다가 지금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쉬고 계신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건물에 얽힌 사연을 물어본즉 이랬다.

경주화교소학교는 1946년에 세워졌으며 회장님이 1회 졸업생이라고 했다. 이후 줄곧 졸업생을 배출하다가 1990년대 들면서 차츰 경주지역 화교인구의 감소 및 빈번한 국내외 유학으로 학생수가 줄어들다가 마침내 1990년대 말경에 폐교, 오늘날까지 방치된 상태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딱히 갈 곳이 마땅찮았던 화교학교 선생님 한 분이 자취를 하면서 살았는데 그마저 수년 전 떠나버리고 지금은 이웃주민들이 학교 운동장에 야채밭을 만들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현재 경주지역 화교인구는 얼마나 되나요?”

회장님이 사람 좋은 웃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한 50명이나 되나…?”

“회장님은 중국 어디에서 오셨어요?”

“산둥(山東)에서 아버지를 따라 왔지. 이곳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화교는 90% 이상 산둥성 출신이라고 보면 돼요.”

50명이라면 1가족을 5명으로 잡고 10가족쯤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재 경주에서 중국집을 하고 있는 중국인 사장님은 거의 100% 이 학교 출신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훗날 경주여중을 다녔다는 어느 여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은성(殷盛)했던 시절 경주화교소학교에는 화교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한국인 학생들도 중국어를 배우러 다녀서 우스갯소리로 “이 학교에는 개도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자기네들끼리 농담을 했다고 한다.

 
회장님을 보내고 나는 다시금 건물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분홍빛과 검은 콜타르가 칠해진 판자때기가 덧대어진 건물 내벽은 진흙을 새끼줄과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지어졌다. 또다시 코끝이 시큰한 감동이 일어났다. 1946년이다. 이때는 중화인민공화국도 수립되기 이전이다. 그 시절 마치 해방공간 우리나라에서 북한의 지주계급들이 공산정권을 피해 남하했듯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군과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내전으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을 때 산둥성의 지주계급들은 가까운 한국땅으로 건너왔구나. 어디 그뿐인가. 그들 중 일부는 한국땅하고도 산 설고 물 설은 경주까지 흘러들어와 이 학교부터 지었다고 생각하니 그 올곧은 신실함에 일말의 경외심마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날 서악동집으로 돌아간 나는 딱 하룻밤을 갈등한 끝에 이곳에서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이튿날 회장님을 만나 계약을 마쳤다. 2011년도 딱 한 달이 남은 11월의 마지막날이었다.

▲ 초창기에는 학교정문이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골목 안쪽에 있다가 나중에 그 맞은편, 현재 ‘운수좋은날’ 정문이 있는 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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