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서라벌별곡] ② 시 한 편과 국밥 한 그릇
[연재-서라벌별곡] ② 시 한 편과 국밥 한 그릇
  • 경주포커스
  • 승인 2015.06.15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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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년[작가. 풀판기획자, 국제펜클럽 회원]
오랫동안 출판기획 및 집필에 종사하면서 문학과 역사의 대중화 작업에 노력해왔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숨겨진 역사의 비밀, 조선왕조실록》,《소설 대왕 세종》,《이태준의 문장 강화》,《삼국지》(전 30권) 등 다수가 있고, 《웅진 푸른담쟁이 우리문학》,《내가 만난 역사 인물 이야기》 등 다수의 출판기획 작업에도 참여해왔다. 경주에 내려온 이후 현재 ‘운수좋은날’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예술과마을’이라는 출판사를 설립, 지역사회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2010년에서 2011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2~3달 사이 경상남북도를 샅샅이 답사한 끝에 마침내 경주에 내려와 살기로 결심하고 서악동 장매마을 한복판에 임시로 살 집을 구해서 가계약을 마쳤다.

이날이 2011년 3월 11일, 대지진의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던 날이었다. 거주할 집을 구했다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멀리 감포까지 넘어가 회를 먹고 있는데 횟집 낡은 TV 속에서 연신 부글부글 끓고 있는 핵발전소 모습이 비춰졌던 것이다.

경상도의 하고많은 도시들 중에 하필이면 경주에 내려와 살기로 결심한 데에는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나의 본가가 있는 대구와 가까워서 이제 80줄에 접어든 노모를 자주 찾아뵐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또 하나는 경주는 상주나 안동 등에 비해 도시인구가 제법 되는 편이어서 자영업을 해서 먹고살기에는 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 시절 전국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열병처럼 번졌던 ‘문학동인회’ 활동을 하면서 학교교지를 만들었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대학교지를 만들었고, 사회에 나와서도 문예지 기자를 시작으로 출판사, 편집회사를 거치면서 평생 책을 만들고 틈틈이 글만 써온 삶을 살았다. 솔직히 지겨웠다. 게다가 20대 중후반, 날이면 날마다 데모를 일삼던 80년대의 한복판에서부터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내가 쓴 한 편의 시(詩)와 식당 아주머니가 내놓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중 과연 어느 것이 가치가 있을까?’

▲ 대구 달성고 검바위 문학동인회 시화전(대구 YMCA, 1978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당시 고교 1학년.
나는 아무래도 국밥 한 그릇이 어쭙잖은 내 시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배 고픈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 말아준 한 그릇의 국밥, 그것이 ‘대그빡’을 쥐어짜면서 만들어낸 한 편의 시보다 훨씬 의미 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한 것은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 경주에 내려올 때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서울에서도 나는 가족은 고사하고 일가친척도 하나 없는 완전한 타관객지였다. 게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는 32살, 당장 취직하기 편해서 들어간 출판 계통의 일이 어느덧 나이 50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생 후반전은 책상머리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땀을 흘릴 수 있는 일,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점을 하고 싶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내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대개 한번쯤 마음속에 품어보았을 꿈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것은 마치 결핍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은 ‘관념적 노동’인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즉물적이고 실체적인 노동’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은 노동의 가치를 당장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데 비해 음식점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예컨대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국밥 한 그릇, 그것을 시장한 사람이 맛있게 먹고 나가는 그런 당장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대한 그리움을 관념노동자들은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한낱 책상물림의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막상 식당을 개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지만 말이다.

2011년 3월 11일 서악동 장매마을 전원주택 가계약을 마치고 경기도 일산으로 올라가 서둘러 주변을 정리한 후 5톤차 2대에 이삿짐을 싸서 다시 경주로 내려온 날이 3월 31일이었다. 일산의 아파트 전세금은 나중에 통장으로 부치라고 해놓고 부랴부라 내려온 까닭은 바야흐로 경주의 벚꽃 시즌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도 유명하다는 경주의 벚꽃구경을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
 

▲ 이사하던 날 비가 내렸다. 신문도 짜장면도 배달되지 않는 마을, 서울 친구들한테 짐짓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는 말이야, 쓰레기를 버리는 곳도 무열왕릉 옆이라규…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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