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서라벌 별곡 ① 집을 향한 긴 여행
[연재] 서라벌 별곡 ① 집을 향한 긴 여행
  • 경주포커스
  • 승인 2015.05.2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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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년. 출판기획자. 국제펜클럽회원
 
오랫동안 출판기획 및 집필에 종사하면서 문학과 역사의 대중화 작업에 노력해왔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숨겨진 역사의 비밀, 조선왕조실록》,《소설 대왕 세종》,《이태준의 문장 강화》,《삼국지》(전 30권) 등 다수가 있고, 《웅진 푸른담쟁이 우리문학》,《내가 만난 역사 인물 이야기》 등 다수의 출판기획 작업에도 참여해왔다. 경주에 내려온 이후 현재 ‘운수좋은날’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예술과마을’이라는 출판사를 설립, 지역사회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20살에 서울로 올라갔다가 50살 되던 해에 경주에 내려왔으니 꼬박 30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에 올라가기 전, 그러니까 유년시절에는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의성군 관내를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살다가 국민학교 4학년이 되면서 대구로 전학,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청소년 시절에는 줄곧 대구에서 살았다.

내 기억이 맨 처음 시작되는 지점은 네댓 살 무렵 안동을 지척에 둔 의성군 단촌이라는 곳에 살던 때다. 이때 두 살 위인 형을 따라 단촌교회 부설 유치원에 잠시 다닌 적이 있는데, 한번은 유치원 아이들과 더불어 강변으로 소풍을 나갔다가 난생처음 기차라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란도셀 가방을 비끄러맨 아이들이 강변 자갈밭 위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별사탕과 비행기 모양의 건빵과자를 꺼내먹고 있을 때 먼 곳에서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눈을 들어보니 놀라워라! 어두운 강물 깊이 뿌리를 박고 높다랗게 솟아 있던 콘크리트 교각 위로 맹렬한 연기를 내뿜으며 우당탕탕 지나가는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구경한 기차의 모습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워낙 선명해서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기차가 지나가면서 전해지던 강렬한 진동이 전류처럼 재빨리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다.

▲ 내 기억이 시작되는 출발점, 그곳으로 찬찬히 거슬러 올라가보면 언제나 빛바랜 화면 이편 끝에서 나타나 저편 끝으로 사라지는 한 대의 긴 기차가 보인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기차와 더불어 근대가 시작되었다’라는 멋진 문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 말을 살짝 빌려서 말하자면 기차와 더불어 나의 기억은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기억이 시작되는 출발점, 그곳으로 찬찬히 거슬러 올라가보면 언제나 빛바랜 화면 이편 끝에서 나타나 저편 끝으로 사라지는 한 대의 긴 기차가 보이는 것이다.

이때가 1960년대 중반, 우리집에서 금성라디오를 월부로 구입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단촌유치원을 다니면서 즐겨 불렀던 노래가 하나 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이 노랫말처럼 이후 나는 의성군 관내를 조금 더 떠돌다가 대구에서 10년, 서울에서 30년, 그리고 다시 경주로 내려와 지금 꼬박 4년이 넘게 살고 있다. 오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경주로 내려왔을 때는 다시는 대도시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흔히 말하듯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나의 이유는 보다 현실적인 것이어서 나는 이제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데다가 평생 책이나 만들고 글이나 써왔던 나 같은 책상물림의 수입으로는 미래가 어두웠다. 게다가 나이는 시시각각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처럼 더 이상 늦기 전에 전원(田園)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새롭게 인생 후반전을 시작해보자―이렇게 된 것이다.

얼마 전 가게 마당에 벽화를 그리려고(경주에 내려온 나는 폐교된 화교소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식당을 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스텐실 도안을 몇 개 주문했더니 그중 하나에 세계지도와 더불어 ‘Life's a voyage that's homeward bound(인생은 집을 향한 여행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말을 누가 했을까, 하고 찾아보니 소설 《모비딕》으로 유명한 작가 허먼 멜빌이 한 말이었다. 이 말 속의 ‘집’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의 안식처가 될 수도 있고, 영원한 휴식(죽음)이 될 수도 있겠다. 요컨대 우리가 결국 돌아가야 할 본향(本鄕)과 같은 것이 허먼 멜빌이 말한 ‘집’의 의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제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까? 답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좁혀, 나는 과연 경주에 제대로 정착한 것일까? 이 질문에는 비교적 답이 분명했다. 나는 아직 이곳 경주에 안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색 중인 것이다.
앞으로 이곳에 실릴 어쭙잖은 글들은 그런 모색의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이므로 널리 혜량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경주포커스 새연재 서라벌별곡은 월 1회~2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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