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풍습은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 미이라의 팔과 가슴에 신(神)의 이름이나 신을 상징하는 문신이 새겨졌음이 확인되었다. 그럼으로 문신은 이미 그 이전부터 행하여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세티 1세(기원전 1317~1301)의 무덤에서 나온 인형에서도 문신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고대역사책인 후한서(後漢書) . 양서(梁書) . 남사(南史)의 동이(東夷)전에 마한 사람들이 문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둑의 이마에 도(盜)를 새기고, 연산군시절에는 도망한 노비를 붙잡아 도노(逃奴) . 도비(逃婢) 등의 글자를 얼굴에 새겼다고 전한다. 또한 강원도 산간 지방에서는 전염병의 예방책으로 이마에 동그라미를, 평안북도에서는 임산부가 난산할 때 발바닥에 천(天)을 먹으로 그렸다고 한다.
중국고대 역사서에서 찾아보면 한반도 북방 주민인 부여(夫餘)전이나 고구려전에는 문신이나 머리를 편두(偏頭, 머리를 돌로 눌러 편평하게 하는 풍습)의 기록이 한 구절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韓)에서는 때때로 문신을, 변진(弁辰)에서는 남녀가 문신을, 백제에서는 가끔 왜와 가까워서 문신을 하는 자가 있고, 진한에서는 남녀가 문신을 한다고만 되어 있다. 어떤 부위에, 무슨 목적으로, 언제 쯤(몇 살 때), 어느 계절에 문신을 하였는지와 관련한 보다 상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 . 변진 . 진한 . 백제 전에서만 문신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고대사회에서의 문신은 생물학적인 존재에 불과 했던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씨족과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표시로, 조직의 계급으로, 자기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사나운 짐승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인식 때, 혼인식 때, 주술적 종교적 의식 때, 범죄자, 노예에게 표시로 시술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문신은 고대사회와는 조금의 다른 목적으로 시술되어지고 있다. 특정한 폭력조직 소속의 표시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기위해서, 연인끼리 사랑의 표시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한 미적(美的) 장식의 의미 등으로 다양하게 시술되고 있다.
노출의 계절인 여름이다. 여름이 되면 문신은 귀걸이, 목걸이와 같은 패션 소품처럼 활용되어지기도 하며, 그 사람의 개성이나 아름다움을 표현해주는 스타일의 일부로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잘못된 문신은 많은 후유증을 유발해,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피부염이나 흉터 등을 초래하기도 하며, 사회적으로는 상대로 하여금 혐오감과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자신은 물론 남들로 하여금 상처와 위압감을 초래할 수 있는 지나친 문신의 시술은 보다 신중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